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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煩惱를 끊는 이야기(간화선의 길

어록을 못 놔 버린 선승

'집 앞의 작은 길이 장안으로 뚫려있다'  이 말은 사실에 있어서 내 마음이 예수, 공자, 부처에게 닿아있고 모든 깨달은 사람에게 닿아있고, 또 못 깨달은 사람에게도 닿아있고, 또 개미, 병아리, 닭, 개 등 생명이 있는 곳에 있다는 말이다.  알음알이를 따라 들어가는 길은 말言은 나오지만 行이 나오지 못하고 아는 것에 얽매임을 당해 스스로 밝지 못한 허물이 있다. 큰 길을 막고 있다. 바른 경험은 사람에게 뚫려 있는 것이다. 이를 아는 사람은 자랑 대신에 겸허가 찾아들고 자비와 지혜가 크고 넓어져 간다.  불성을 본 사람은 날마다 내가 먼저 새로워져 간다. 마음은 비어 있다. 하지만 할 것은 다 한다. 그리고 그 하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성품은 내가 깨닫고 못 깨닫고와 관계없이 본시 나에게 존재한다. 돌아봐 허물이 고쳐지면 누구나 이 自性인 성품에 이른다. 눈이 사물을 따르는 것은 성품을 등지는 길이다. 몸을 의지해 몸이 아닌 것을 본다. 번뇌망상을 의지해 번뇌망상 아닌 것을 본다.  방향 없는 공부는 내 마음에 상대를 짓는 습習 (수受 가운데 하나이다. 수受는 다른 마음작용인 촉觸이 발생할 때 동시에 생겨나는 마음작용)만 늘어난다. 그 습이 또 다른 경계를 만들고 비교하는 마음만 늘어난다.

 

비교하면 남이 있고 내가 있고, 惡이 있고 善이 있고, 지옥이 있고 천당이 있고, 많고 적음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때문에 열등감이 일고, 단견, 상견에 떨어진 이들이 많다.  (윤회와 관련해서는 윤회 없음을 말하는 단견斷見이고, 유물론唯物論과 아뜨만의 윤회를 말하는 것이 상견常見이다,  불교는 단견과 상견 모두를 벗어난 가르침이다) 불성을 보려면 자기 다른쪽을 봐야 하는 이유는 육안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깨달은 사람은 구름이 걷히고 난 뒤 이 푸른 하늘을 보고 나온 분들 이다.  이 사람은 푸른 하늘 아래 구름을 내려다 보듯이, 이 세상을 뜬구름처럼 보고 산다. 성경에서 예수는 다른 비유로 초심을 본다. " 저 하늘에 나는 새를 봐라.  너희 하나님은 씨 뿌리고 거두지 않아도 다 먹게 해 놓지 않았느냐?  왜 너희들은 걱정하느냐?" 라는 말도 그것이다.

 

예수는 '하나가 지닌 능력은 네가 모르게 온다'라고 말하고 있다. 또 예수는 말한다. ' 우리에게 형상 없는 것을 마음으로 짓고 섬기는 것을 경계하기 위하여 우상을 섬기지 말라'한다. 금강경에서 여래의 32상 또한 그 相이다.  여래는 상을 좇는 자는 외도를 행하는 자라고 꾸짖는다.  성인은 相이 상 아닌 것을 보고 중생은 상만 본다. 이 상 속에서는 볼 수가 없는 것이 하나님의 성질이다. 구름이 하늘을 가리면, 별도 보지 못하고 달도 태양도 보지 못한다.  나를 가리면 부처도 보지 못하고, 예수의 지혜도 보지 못한다. 이런 곳에 살고 있는 우리는 너와 나사이에 칸막이가 있고, 다툼이 있다. 일고 꺼지는 일에 눈이 팔려 밖에서 찾아 헐떡거리고 산다. 그러나 성품을 본 사람은 그 안에서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해 있는 길을 만난다. 오온개공五蘊皆空이다.

 

사람의 성품을 놔두고 어록에서 얻은 선은 사람의 인성만 교활하게 만든다. 그것이 지혜가 없는 중생 속에 갇혀 있는 선이다.  눈 앞에 있는 사람에게 아무 이익을 주지 못한다.  좋은 공부를 하고 난 뒤에도 그런 것 들이 붙어다니는게 중생이다. 우쭐하고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밖으로 나온 것은 그런 것이다. 문명이 급변하고 있는 가운데 현대인들은 조바심만 늘고 있다.  급한 마음을 그치는 것은 사람이 지니고 있는 성품을 만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