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경우 일상생활 속의 우리 자아는 슬픔, 두려움, 좌절 이러한 불쾌한 사실을 견디기를 힘들어 한다. 괴로움이 인간을 이루는 한 부분인데도, 우리가 괴로움으로부터 상처 받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는 환상을 선호한다. 우리는 우리가 이미 정해진 길을 향해 걷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길 모퉁이를 돌면 우리가 예상했던 곳과는 전혀 다른 곳이 나타난다. 잔잔한 호수가 있는 찬란한 초원일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대신 깊은 분화구의 황폐한 풍경이 나타난다.
애들은 텔레비전을 통해 일상의 사회를 배워 나간다. 성인들도 마찬가지겠지만...텔레비전에서 보는 것은 폭력, 성폭행 그리고 인간들이 서로에게 주는 폐해다. 이런 끔찍한 것들에 대한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들은 자기 전에 아이들로부터 나온다. 강도가 우리 집에 침입 할 수 있나? 어린아이들은 길거리에서 납치될 수 있나? 연쇄 살인범이 무엇인가? 이곳에도 지진이 일어날까? 모든 아이들은 이런 소재들을 통해 자아의 세계에 대한 감각을 발달시킨다. 한 순진 무구한 어린아이가 당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악이 무엇인지, 자연재해가 무엇인지'를 물을때 당신은 무엇보다 그를 안심시키고 싶을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완벽하게 안전하다. 지진도, 홍수도, 화재도 일어나지 않을꺼야. 우리가 너를 보살펴 줄께. 나쁜 일은 멀리 다른 나라에서만 일어나는 것이란다." 우리는 이런 대답을 해주면서도 안다. 전부 거짓말이라는 것을. 겁에 질린 아이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인간의 취약성이라는 진실을 부정하는 환상에 불과하다. 그리고 부모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우리는 이런 선의의 거짓말을 아이에게 하는 만큼 우리에게도 하고 있다. 물론 우리는 어른, 아이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도 보장된 안전은 없다는 것을 알고, 예상치 못한 위험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우리는 그들을 위험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보호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결국 에는 두려움과 취약성이 일상생활의 일부분이라는 것. 어떻게 그것들을 극복할 수 있는지를 가르치기 보다는 두려움을 무서워 하는 방법, 취약성을 가르치는데 그치고 만다.
인간이 몸과 자아를 가지고 있는 한, 취약성으로부터 보호해줄 안전막은 어디에도 없다. 몇몇은 부나 권력, 특권 등을 가지고 이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막아내지만 우리는 여전히 취약하다. 이러한 취약함은 어둠의 정서를 향한 통로로의 여행이기도하다. 무력감, 공포, 슬픔, 분노, 그리고 절망이 취약성을 만드는 요소다. 취약성은 단지 상처에 대한 것만 아니다. 이것은 열려 있음이다. 고통, 역경, 상실 그리고 죽음에 대해서만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장 동경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그것은 사랑, 친밀함, 섹스, 탄생 그리고 경이로움을 향해 열려 있다. 취약성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열려 있기 때문에 때로는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때로는 좋지 않은 영향도 준다. 이것이 우리의 상호연결성의 핵심이다. 우리가 취약하기 때문에 고통을 느낀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고통만이 아니라 타인들의 고통까지도 느낀다. 우리가 타인들에게 하는 것은 역시 타인들이 우리에게 하는 것이다. 취약성은 우리 인간의 공감능력의 기반을 이룬다. 그 공감은 괴로움뿐만 아니라 사랑에 다한 것이며, 고통뿐만 아니라 자비에 대한 것이며, 외로움 뿐만 아니라 유대감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상처받기 쉬운 순간이 우리가 가장 생생하게 살아 있을 때이며 우리가 열려 있을 때이다. 자신의 취약성을 다른 곳에 기대지 않고 진실을 피하려 하지 않고 직면함으로써 우리는 그 미지의 것을 향해 자신을 내던지고 새로워진 삶을 하사받는다.
우리의 무력함이 우리에게 겸허함을 가르친다. 고통에 의해 겸허해질 때 우리는 광대한 우주 속에서 우리의 보잘 것 없음을 볼 수 있다. 우리가 통제라는 주먹을 펴고 그 손을 받음과 줌을 향해 활짝 열어놓을 때, 한때 우리가 겪은 고통의 근원이었던 우리의 보잘것 없음이 편안함의 근원이 된다. 비밀스런 연금술을 배우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기꺼이 괴로움과 취약성을 삶의 당연한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취약하기 때문에 삶은 괴롭다. 우리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여기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삶에 의해 상처입은 마음을 가지기 위해 여기 있다. 취약성과 함께 사는 것을 배우기 위해, 고통을 사랑으로 바꾸기 위해....
우리가 진정으로 배워야 할 것은 가감없는 현실이다. 우리 모두는 행복한 연희나 만찬에 앉아 만족이라는 빵과 환희라는 포도주를 즐기고 싶어 하지만, 소화가 잘되지 않는 감정이라는 음식은 피하려고한다. 인생의 많은 음식들 가운데 모든 음식이 한결같이 맛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모두가 소화되어야 한다. 우는 방법을 알기 전까지는 진심으로 웃을 수 없다. 슬퍼하기를 두려워 한다면 행복할 수 없다. 평화롭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모든 감정을 함께 해야 하고 우리의 취약성에 대해 편안하게 느껴야 한다. 깊은 슬픔, 두려움 그리고 절망은 가장 기본적인 인간감정이다. 이러한 감정들 없이는 완전한 인간일 수 없고 살아가기도 힘들다. 깊은 슬픔은 우리가 외롭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며, 두려움은 우리에게 우리의 생존을, 자기보호 본능을 넘어 타인들의 생존까지 보호하라고 일깨워 준다, 절망은 혼돈 또는 의미없음의 한가운데서 의미를 찾을 것을 부탁하고, 괴로움 속에서 삶의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은 불행 속에서 살아 남고 불행을 초월할 수 있는 인간 능력의 기초를 이룬다.
이 어둠의 감정이 가지고 있는 목적은 우리가 그들을 주의깊게 경험할 때, 그들의 격렬한 에너지를 견뎌낼 때, 그들을 그들이게 놓아 둘 때에야 비로소 명백해진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러한 감정을 두려워하고, 가치를 폄하하는 문화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우지 못했다. 감정 공포증은 어둠의 감정을 독으로 만들어 우리 마음이 혼란스럽고, 무감각하고, 침울하고, 조바심 나고, 소외당하고 외롭도록 만든다. 많은 성인들의 감정 지능과 비교했을 때 아이들은 감정적으로 천부적인 자질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들은 감정이 무엇인지,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본능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들은 감정이 정보를 전하고, 표현을 찾아주고, 행동을 유발시키는 몸속 에너지라는 것을 알고 있다.
성인들은 감정에 대해 말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말할 때에도 자기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감시하고 수정하는 경향이 있으며 감정을 간접적으로만 언급하고 '이번에는 정말 힘들었어'와 같이 상세한 뜻을 전달하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슬픔과 우울을 구분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며 자신의 마음의 동요가 두려움 때문인지, 슬픔 때문인지, 절망감 때문인지 구분하는데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 어른들은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것을 창피하게 여긴다. 그러나 아이들은 성인들보다 훨씬 더 몸속 감정들에 충실한 채로 살며, 따라서 선입견에 의거한 판단과 믿음에 휘둘림 없이 감정 에너지에 동조할 수 있다. 아이들의 안테나는 자기 안과 밖의 감정 에너지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아이들의 감정 지능은 그들 자신과 세상에 대한 본능적인 호기심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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