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느끼고, 이해하고, 우리의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 특히 우리가 부정적이라고 부르는 감정을 통제하는 능력이 행복한 삶을 누리는데 필수 불가결하다는 것을 점점 더 절실하게 깨닫고 있다. 세계에 만연한 슬픔과 공포 그리고 절망의 이미지들이 우리가 그곳에 살고 있는가 여부와는 관계없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오래된 반목들이 격정적인 복수로 분출되는 끔찍한 테러와 전쟁, 그리고 늘어만가는 일상생활에서 폭력은 안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위협하고, 세상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갉아먹고 있다.우리의 정신적 도덕적 영적인 환경을 오염시키고 있다. 부정적 감정이 그렇게 해로운 데도 어째서 우리는 그 맹렬한 에너지를 길들이지 못할까? 부정적인 감정에 대해 그렇게 잘 알고 있는데, 왜 우리는 그것에 그토록 휘말리는 것일까?
일상생활에서 피할 수 없는 감정인 슬픔, 절망 그리고 두려움을 존중해야 한다. 어째서 슬퍼하고 두려워하고 절망하는 것일까? 거기에는 우리가 부정적이라고 부르는 다른 감정도 있다. 질투, 죄책감, 수치심 그리고 화는 그 가운데서도 인간 고통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억눌린 슬픔은 종종 우울, 불안 혹은 중독으로 나아간다. 무감각해진 두려움은 비이성적인 편견, 지독한 분노, 폭력 행위로 쉽게 전이된다. 압도당한 절망 또는 무의식적인 절망은 심각한 정신적 마비나 자신이나 타인에게 파괴적인 행동을 통해 표출된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좌절된 슬픔, 두려움, 절망이 우리 시대의 정신적 혼란 즉 우울, 불안, 중독, 비이성적 폭력과 심리적 마비의 근원이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당하게 될 것이다. 당신의 부인이 암으로 죽거나, 당신의 남편이 다른 여자와 바람 나거나, 당신이 직업을 잃거나, 당신의 아이들이 아프거나, 폭행당하거나, 어린시절에 당한 폭행의 기억이 떠오르거나, 심각한 질병을 진단 받거나, 당신의 부모가 돌아가시거나,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이 죽을 수도 있다. 또는 당신의 개인적 불행이 아니라, 이 세계의 불행과 고통에 대한 인식이 당신의 슬픔, 두려움, 절망의 근원일 수도 있다. 우리 마음을 가장 힘들게 하는 감정은 깊은 슬픔, 두려움 그리고 절망이다. 이 어둠의 감정은 몸속에 존재 하는 에너지로, 우리를 둘러싼 문화로부터 습득해온 믿음들에 의해 왜곡되어 있다. 이들의 목적은 우리를 비참하게 하거나 , 화나게 하거나, 치욕스럽게 하거나, 약하게 하거나, 패배시키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우리에게 우리자신, 타인들 그리고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마음을 열도록 가르치고, 우리가 우리의 삶을 치유하고 변화시킬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들에게 귀기울이는 법을 알 때, 우리는 우리의 자각능력으로 마치 파도타듯 그 감정을 올라탈 수 있다. 그럴 때 감정 에너지가 흐르고, 마음속에 숨겨져 있던 문이 열린다. 깊은 슬픔은 우리가 잃은 것들에 대한 슬픔으로부터 아직 남아 있는 것들에 대한 감사로 우리를 옮겨준다. 불확실하고 불안한 삶에 대한 두려움은 열려있는 충만한 삶의 환희로 승화된다.
인간의 정신적인 치유는, 누군가 들어줄 사람이 없다면 치유과정은 그 자리에서 멈추어버린다. 인간은 해를 향해 몸을 기울이는 식물같이 본질적으로 치유를 향한 굴지성을 가지고 타인을 향해 몸을 기울인다. 누군가 내게 먹을 것을 주는 것보다 내 말을 들어주는 것이 더 중요할 때가 있다. 애정깊은 간호의 가장 본질적인 형태는 타인의 괴로움을 잘 들어주는 것이다. 아이들은 들어줄 사람이 있을 때에는 자신의 고통을 스스럼 없이 말한다. 그리고 아무도 들어줄 사람이 없을 때에는 그 아픔을 감추는 법을 배운다. 하지만 괴로움을 귀기울여 들어주기란 여간 힘든일이 아니다. 괴로움이 크면 클수록 상대적으로 들어주기가 더욱 힘들어진다. 어둠의 감정은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이들은 또한 전염성도 크다. 그 에너지들은 우리가 서로를 겪리시켜 놓으려 해도, 그 경계선에 관계없이 우리 사이를 자유롭게 흘러다니며 감염시킨다.
괴로움을 경청하는데 드는 노력과 어려움 때문에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수많은 사람들이 심리치료사라고 하는 전문가를 찾는다. 듣기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목적없이 한 영역에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경청한다는 것은 단순히 단어의 나열을 듣거나, 바디 랭귀지로부터 의미를 해독하는 것이 아니다. 듣기 전문가는 대뇌피질을 통해 듣는 것만큼이나, 직관의 제 3의 귀인 대뇌변연계를 통해 자신을 비워 다른 사람의 사연이 들어오도록하며, 감정의 힘찬 흐름에 마음을 열고 타인의 경험과 과감히 하나가 된다. 머리를 가슴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문화에서는 일반적으로 귀기울여 잘 들어주는 것을 상담치료 기술로 배우지 않는다. 이러한 문화에서 훈련받은 치료사는 상담내용을 이론화하고. 분석하고. 진단하고. 예지하고. 해석하고 질문하는데 능란하지만 환자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지는 못한다.
우리가 정말로 귀 기울여 듣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발견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발견한 사실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 앎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청할까? 이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잘 들어주는 것이 사람들의 치유를 돕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자신에게 경청하는 것이 자기치유의 비결이다. 가장 심오한 치료는 종종 바로 가장 깊은 괴로움과 함께 한다. 그 거대한 괴로움이 우리를 그것과 마주하도록 끊임없이 몰아부치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을 귀 기울여 들음으로써 우리의 본모습, 우리의 몸이 담고 있는 앎, 우리의 세포들이 담고 있는 감정의 지혜를 배울 수 있다. 무엇이 자신을 아프게 하는지 면밀히 들을 때 삶이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다.
억압, 불관용, 모욕, 징벌, 무시가 전형적인 특징인 문화에서 우리는 바쁘게 움직이거나, 충돌을 회피하거나, 감정을 마비시키거나, 흉내를 내거나, 약물을 복용하는 등 감정의 힘을 회피하기 위한 모든 수단을 배운다. 이런 환경에서 어둠의 감정 에너지는 불안 , 우울, 중독, 남용, 정신적 마비, 폭력, 격리 같은 치명적 행동과 정신상태를 일으키는데 주요한 역할을 한다.우리는 슬플 때 쥐죽은 듯이 있고, 화가 날 때 조용히 꾹 참고, 무서움을 느낄 때 멀리 밀쳐내도록 배워왔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통제 하거나 혹은 남들이 보지 못하도록 숨기라고 교육 받아왔다. 감정을 무시하거나, 느끼는 것을 막거나, 모욕이나 벌을 주는 것은 아이들을 감정적 문맹으로 만드는 가장 흔한 교육법이다. 우리의 문화 전체가 이러한 종류의 문맹을 그저 장려하기만 하고 있다. 감정 공포증의 문화속에 사는 우리는 감정적 고통을 경청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정뿐만이 아니라 학교에서도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나쁜 짓이란 것을 가르친다.
우리 몸은 성적학대나 감정적 방치, 슬퍼할 수 없었던 상실들과 말 못할 깊은 슬픔들의 감정적 상처를 지니고 산다. 감정이 굉장히 강렬하거나, 괴로울 때 우리는 종종 지각을 몸 밖으로 버리고 망상, 불안 등에 의지함 으로써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 몸안의 불편함을 회피한다. 감정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남성들은 자신의 몸을 감정으로부터 방어해야한다는 혹독한 세뇌과정에 얽매여 있다. (한 영웅이 죽음, 살인, 이혼 등의 슬픈 사건이후, 술집에 앉아 술을 마심으로써 남자답게 감정을 날려버리는 영화를 우리는 얼마나 보아왔던가!) 요컨대 이는 사내다움을 강요한 이미 일상화 되어버린 감정 학대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어둠의 감정의 힘과 지혜를 발견하는 것은 능동적인 의지, 감정적 노출을 감내하려는 결단력, 우리의 유약함에 대한 용감한 관찰 그리고 신체의 감정적 신호들을 경청하는 능력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능력들이 없다면 어둠의 감정은 그들 스스로를 우리의 몸과 마음, 영혼에까지 악영향을 미칠 맹독성의 물질로 버리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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