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번뇌煩惱를 끊는 이야기(간화선의 길

나를 밝게 하는 공부(2)

노자가 말한다. ‘만물은 상대를 의지해서 성장한다.  그러나 道는 거기에 아무 관심이 없다’  (도는 무엇을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 의지하고 있지만 관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관계하지 않는다는 말은 비어있다는 다른 말이다. 그러나 모든 생명의 원리는 상대적인 두 개가 서로 의지해서 생긴다. 그러면서 서로 집착한다. 사회도 학교도 이런 상대적인 두 개를 가르친다.  우리가 배운 것은 철학자나 성현들의 말에서 온 것들이다. 우리 근본 성품이 빈 것이라는 것을 배우자는 것이지, 좋은 말을 지켜 가지고 있는 자체가 아니라는 것 이다. 지키는 것을 놔버리게 한다.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종교에 붙어 세월만 보낸다. ‘... 아침에 살아 있다가 저녁에 죽고마니 찰나 사이에 다른 세상이 되어버렸네. ‘

 

물위에 비치는 그림자를 지울수 있겠는가. 망상을 지우려는 노력은 헛수고일뿐! 그냥 그림자인줄 알고 있으면 그림자는 나를 상관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그림자로부터 자유롭다.  긁어서 부스럼 만든 것은 어리석다.  (부족함, 장애 같은 그림자는 그림자인 줄 알면 그로인한 괴로움이 사라진다) 본래 나는 생멸이 없고 오고감이 없다.  ( 원래 나는 없는 것이니 생기는 것도 사라짐도 없다) 그래서 나는 편안하다. 헛 노력해 봐야 쓸데없다. 나무는 나무마다 다른 꽃을 나무 끝에 피워내다. 그리고 꽃마다 아름다움을 품고 나온다. 우리가 부러워하는 속엔 생각보다 어둠이 많다.  불교는 깨닫는 공부지 아는 공부가 아니다.  아는 것은 그 사람이 심성을 쓰는 것에 따라 학문이 될 수 있고, 외도가 될 수도 있다. 외도는 사람을 널리 이익되게 할 수 없다. 마음엔 아무것도 없는데 생각이 먼저 일어나 내 마음 노릇을 해 버리는 것, 공부에게는 이것이 혼란이다.

 

道의 다른 이름들 옳은 것, 또는 바른 것, 眞我, 부처, 진리, 善, 영원하다는 것 등이다.  믿음은 남과 내가 가장 가까이 있게 하고 먼시간을 가까이 데리고 온다. 믿음이 없는 만남은 가까이 있어도 먼 사람 같고,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가까워지는 것도 이 믿음이다. 깨달음은 만인을 평등하게 보는 눈을 갖게 한다. 보려면 당장에 곧 보아야 한다. 생각을 머뭇거리면 곧 어긋난다. 성품에 맡겨 소요逍遙하고 인연에 따라 놓아버려라. 도를 배우는 사람이 만약 성불하고자 한다면 일체 불법을 모두 다 배워야 소용이 없다. 오직 구함이 없고 집착이 없음을 배우라. 구함이 없는 것이 곧 마음이 나지 않음이요. 집착이 없는 것이 곧 마음이 소멸하지 않음이요, 나지 않고 소멸하지 않음이 곧 부처이다. (집착이 마음을 점하면 마음이 없는 것이다.) 생각에 형상이 없음과 생각에 함이 없음이 곧 부처니라. ( 생각에 형상 없음이 분별이 없는 것이고 생각에 의도가 없는 것이 무위고 올바른 행위다)

 

큰 도는 수행으로 얻는 것이 아니네

수행을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범부를 위해서다.

이치를 알고 나서 수행을 돌이켜보면

잘못 공부한 것을 비로소 알리라.

 

마조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견해를 가져야 도를 깨달을 수 있습니까?

자신의 성품에 본래 갖추고 있으니

선과 악에 막히지 아니하면 도를 닦는다고 말할 수 있다.

 

20년, 30년을 여러 생의 계획을 마련해서 심신을 갈고 닦아 마음의 때가 깨끗하게 없어짐에 이르러 털끝만한 허물도 없도록 했다. 경계를 만나거나 인연을 만나면 그것을 보기를 마치 담장의 기왓장이나 돌멩이를 보듯 했다. (탐욕, 집착이 없어 마음을 비우는 것이 마음 공부다) 세속의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마음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맑고 고요했다. 이것을 일러 금강의 정체正體라 했다. 벗은 듯이 깨끗하여 원만하게 된 연후에 어떤 조작도 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 에 맡겼다.  비록 세상에 대해 무심해 보이지만 세상에 대한 마음은 항상 간격이 없었으며, 비록 모든 것을 제도할 마음이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모든 것을 제도하려는 마음은 비가 쏟아지는 것처럼 다함이 없었다. 소동파는 과거를 볼 때 군자의 정의와 자비에 대해 논하라는 문제에 이렇게 답했다.  “ 군자의 자비는 얼마든지 자비로워도 좋다.  그러나 정의는 정의를 너무 강조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정의가 지나치면 잔인해지기 때문이다. 정의가 자비를 잃어 끝없이 몰락한 존재, 불교의 아수라가 바로 그런 존재다. 

 

부처 성품에는 시끄러움이 없다. 왜나하면 그 성품에는 상대를 짓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시끄러움은 자기 마음에 상대를 짓고 있을 때 나온다.  상대를 자기 마음에 짓지 않고 나오는 소리는 내 속에 남이 있고, 남 속에 내가 있다.  서로 한 뜻을 공유한다. 이 공유는 부처에 통하고 중생에게도 통하고 잇다. 그래서 공유다. 다툼이 없는 마음을 공성 空性이라고 한다.  시람이 긴장하는 것은 이 공성을 멀리하는 데서 온다.  그리고 상대를 만난다.  좋고 나쁨이 있다. 시끄러움이 있다. 윤회 속에는 그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곳엔 인과가 있고, 고苦를 받고 싫어함을 동반한다. 자기 생각 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산다.  몸도 외롭고 마음도 시끄럽다.  나를 혼란 속에 두고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