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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마음-달라이 라마의 성경 강의

부활

“ 마리아는 무덤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속을 들여다보니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편에 앉았더라.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줄 알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하느님,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하라 하신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느니라.” (요한복음 20장10절-18절 )

 

세계 주요종교의 공통된 주제는 종교를 창시한 스승들은 자신의 생애를 통해 스스로 고통을 체험하고 고통의 가치를 깨닫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몸은 세가지로 설명한다.  육체적인 몸, 미묘한 몸, 영적인 몸이 그것이다. 돌아가시기전의 몸이 육체적 몸이다. 하느님 아버지께 승천하지 않은 몸이 미묘한 몸이다. 하느님 아버지께 올라간 후 몸이 영적인 몸이다.  불교에서 미묘한 몸에 대해서는 평범한 육체적인 몸이 깨달음을 얻은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 한 학파는 부처님의 '열반이 존재의 마지막 장식'이라고 한다.  열반은 불꽃의 마지막 순간처럼 보인다. 거기에는 없음, 고요, 평온만 있다. 그럼 왜 부처님을 존경하고 숭배하는가? 부처님은 공덕을 쌓고 지혜를 완성한 결과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렀다.  부처님은 자신이 하는 모든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도움을 주는 아주 강한 이타주의 마음을 키웠다. 그 에너지와 진리는 남아 있다. 우리가 부처님을 숭배할 때 도움을 주는 것은 그 힘이다.

 

많은 불교학파는 불성이나 완전한 깨달음을 삼신, 부처님 세가지 모습으로 이해하고 있다. 부처님이 의식과 마음의 흐름은 계속 이어져 왔고,  지금도 항상 존재하고 있다.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에게 가장 알맞고 도움이 되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고 계신다. 부처님은 눈을 감으면서 모든 사물은 순간적이고 덧없다는 무상의 중요한 가르침을 남겼다.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부처와 여래조차 덧없는 존재이며 이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하였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내가 올 곳을 알고 내가 갈 곳을 아노라.... 나는 아버지로부터 왔노라 ’  예수님 승천은 하느님속에 있는 자신의 근원과 다시 합치는 것이다. 도시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인간의 삶이 한치 오차도 없이 꽉조여진 나사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한다. 살아남기 위해 자신에게 강요되는 속도와 방식에 따라야만 한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위해 특별히 시간을 내지 않는다면, 늘 해야 할 여떤 일이 있을 것이고, 늘 너무나 바쁠 것이다. 탁월한 언어와 사상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한계를 뛰어넘게 하였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른 사람들의 종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예수님은 ‘나는 섬기는자로서 너희 속에 왔노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역사 속에서 세속적, 정치적, 종교적 권리를 추구해 왔으며, 제국주의나 여러 모습의 권위주의를 통해 사람들을 억눌러 왔다. “..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 까지 빼앗기리라.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또 가라사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섬긴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저희가 알아들을 수 있는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비유가 아니면 말씀을 아니 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 마가복음 4장 26절-34절 )

 

예수님은 사람마다 다른 이해 능력을 존중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모든 사람이 똑같이 신성한 존재가 될 씨앗을 가지고 있다고 하신다.  하느님 나라는 공간적 장소가 아니라 경험이다. 하느님 나라는 겸허하고 단순한 사람에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고 말했다. 죽어야 산다. 죽음이 생명이다. 죽지 않으면 생명은 없다. 처음에는 개인적이고 자기중심적 한계속에서 소박하게 시작하지만, 차츰 그 한계를 뛰어넘어 세상과 타인을 향해 무한히 열려 있게 된다. 하느님 나라 특징은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온화함, 자기 절제, 겸손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을 버려야 한다. 생명을 얻으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하느님 나라를 전파하는 일은 병을 치료하는 일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인간 존재가 하느님 앞에 맞서 새워놓은 모든 방어물중에서 가장 취약한 곳이 인간이 겪지 않으면 안되는  ‘고통’이다. 고통은 예수님에게도, 우리에게도 자비의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에수님은 생활방식, 삶의 자세를 지시한다. 예수님의 제자가 살아가는 모습은 물리적으로 가난하고 철저하게 소박하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로고스로 설명한다.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은 보편적인 지혜의 관점에서 바라봐야만 한다. 예수님은 스스로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세상에 온 빛으로 설명한다. 예수님과 관계맺는 것은 인간의 마음에서 무지와 두려움이라는 어둠을 걷어내는 깨달음의 과정이다. 사랑은 하느님의 본성이다. 이 사랑이 곧 성령이다. 모든 인간 존재에게 주어진 사명은 사랑이라는 하느님 본성을 완전히 꽃피우는 것이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 또한 무조건적으로 모든 존제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부활의 의미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죽음이 환상에 불과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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