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는 암스테르담에 있는 유대인 자치단체의 일원이었지만, 이단이라는 이유로 파문당했다. “비판적 글 읽기를 통해서 우리는 성서의 복음서와 다른 책 사이에 존재하는 일련의 모순을 인식한다. 그러나 신약 텍스트의 겉으로 드러난 표면 아래에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대변자라고 할 수 있는 예수를 만나게 된다. 예수의 말씀이 사람들을 경직된 유대교에서 해방해 주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사랑을 최고의 선으로 생각한 이성의 종교를 전하였다. 스피노자는 여기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물론 우리 이웃에 대한 사랑도 이야기 한다. 그러나 '기독교 역시 딱딱한 교의와 의미없는 의식으로 굳어버렸다' 는 그의 생각은 기독교회와 유대교회에서 납득하기 어려웠고, 상황이 점점 나빠지자 가족들조차 스피노자를 돌보지 않았다. 그는 안경 렌즈를 세공하는 일로 생활비를 벌었다.
우리는 우리 삶을 우주적 연관속에서 바라볼 수 있을까? 우리가 자연의 모든 생물 가운데 일부라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큰 연관속의 일원이다. 스피노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자연이라고 말하면서 신과 자연을 같은 것으로 보았다. 신은 세계를 창조하고 나서 그 옆에 있는 분이 아니라, 바로 세계라고 생각했다. 어느 때는 표현을 바꿔 '세계가 신 안에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신안에서 살고 활동하며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라고 사도 바울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철학자들은 윤리학을 인간이 훌륭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다루는 학문이라고 이해한다. 스피노자가 쓴 윤리학이란 말은 삶의 지혜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수학적 방법을 철학적 성찰에도 적용하려고 하였다. 합리주의인 스피노자는 자신의 윤리학에서 자연법칙이 인간생활을 조종하는 원리를 보여주면서 인간은 감정과 지각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마음의 평정을 얻고 행복해 질 수 있다고 했다. 스피노자는 실체를 둘로 나누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유일무이한 실체가 있어 존재하는 모든 것은 거기에 귀속한다고 했다. 그 하나를 실체라 하고, 때로는 신 또는 자연이라고 불렀다. 스피노자가 자연이라는 말을 사용할 땐 공간적 자연만을 생각한 것이 아니다. 실체, 신, 자연이란 존재하는 모든 것들, 그러니까 정신적인 존재 역시 포함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개별 현상들은 사유와 연장이라는 속성의 다른 양상이다. 양상이란 실체나 신 또는 자연이 자기를 나타내는 특정한 방식을 뜻한다. 꽃은 연장이라는 속성의 한 양상이고 이 꽃을 노래한 시는 사유라는 속성의 한 양상이다. 생각되는 모든 사유는 신 또는 자연의 사유이다. 모든 것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신 또는 자연법칙을 모든 일의 내면적 원인으로 간주하고 있다. 신은 오로지 자연법칙을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에 외부적 원인이 아니다.
신은 슬며시 꼭두각시 끈을 잡아당겨 일을 결정하는 조종자가 아니다. 신은 세계를 자연법칙에 따라 다룬다. 자연의 모든 일은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이렇듯 결정론적인 자연관을 갖고 있었다. 자기 감정에 휩쓰려서는 안된다. 그것이 스피노자의 윤리학이 말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나무는 자유롭다. 그것은 자기의 가능성을 마음껏 실현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사과나무라면 그 나무는 사과나 자두 가운데서 아무것이나 원하는 대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갖지는 않는다. 우리 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정치적 상황이 우리의 성장과 인격적 발달을 저해할 수도 있다. 또한 어떤 다른 외적인 강제가 우리를 억압할 수도 있다. 오직 우리가 우리 안의 가능성을 자유롭게 발전시킬 수 있을 때 우리는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오직 하나의 존재만이 철저히 자기 원인으로서 완전한 자유속에서 행동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신이나 자연만이 이처럼 자유롭고 필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는 우리 육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 우리의 육체는 연장이라는 속성의 한 양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선택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로운 영혼이 없는 존재다. 그것은 기계적인 육체 안에 갇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