흄
오늘날 흄의 철학을 가장 중요한 경험철학으로 간주한다. 위대한 철학자 임마뉴엘 칸트에게 철학적 영감을 준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프랑스 위대한 사상가 볼테르와 루소처럼 계몽주의 시대를 살면서 유럽을 두루 여행하고 다시 에든버러에 정착했다. 중요 저서 ‘인간 본성론’을 출판했다. 누구보다도 흄은 일상적인 세계를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흄은 아직 의식 속에 사유와 반성이 자리 잡지 않은 어린애가 세계를 어떻게 체험하는지 다시 생각해 보고자 했다. 흄은 제일 먼저 인간이 한편으로는 인상을, 또 다른 한편으로는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그는 인상이란 외부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감각이고, 그러한 인상에 대한 기억이 바로 관념이라고 했다. 난롯불에 화상을 입으면 하나의 직접적인 인상을 받게 되고, 훗날에 기억하게 되는 이것을 흄은 관념이라고 불렀다. 흄은 현실 속에서는 그에 대응하는 복합적 사물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떤 관념들을 합성할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를 통해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는 거짓된 사물의 관념이 생겨난다. 우리 의식은 관념을 제 마음대로 조립해 낸 것이다. 모든 구성요소는 이미 감각된 것이며, 의식은 다만 가위와 풀을 들고 거짓된 관념들을 구성해 낼 뿐이다.
우리는 신을 무한한 지성을 가진 지혜롭고 선한 존재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무한한 지혜와 무한한 지성과 무한한 선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복합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한번도 지성이나 현명함이나 선을 체험해 보지 않았다면, 절대로 신에 대한 그런 개념을 떠올릴 수 없다. 신의 개념은 우리가 어린 아이 때 아버지를 어떻게 체험했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말하자면 아버지에 대한 관념에서 천국의 아버지, 곧 신에 대한 관념이 생겨난다. 흄은 대응하는 감각인상으로 환원될 수 없는 모든 생각과 관념을 비판했다. 그는 오랫동안 형이상학적 사고를 지배하고 불신을 심은 무의미한 헛소리를 단호히 추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도 역시 이런 개념이 참인지 거짓인지 생각해보지도 않고 아무렇게나 쓰고 있다.
우리의 자아 관념은 실제로는 내가 결코 동시에 체험할 수 없는 낱낱의 인상들의 긴 사슬로 이루어져 있다. 흄은 이것을 끊임없는 흐름과 운동속에 있으며, 엄청난 속도로 계속 이어지는 수 많은 의식 내용들의 다발이라고 표현했다. 우리의 의식은 일종의 극장과도 같다. 무대 위에서는 수많은 의식 내용들이 뒤따라 등장하며 왔다가 사라지고, 무수히 많은 배열과 배치방식에 따라 서로서로 뒤섞인다. 의식이란 스크린 위를 지나가는 영상과도 같다. 스크린 위의 영상은 너무도 빨리 바뀌기 때문에 우리는 영화가 낱낱이 화면들이 모여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영화는 순간들이 총합이다.
석가는 인간의 삶을 정신과 육체가 끊임없이 변해가는 과정의 연속이며, 이 과정에서 인간은 순간마다 새로워진다고 했다. 젖먹이는 어른과 같지 않고,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가 아니다. 어떤 것에 대해서도 그것은 나의 것이라고 말 할 수 없고, 또 어떤 것에 대해서도 이것이 '나'다라고 말 할 수 없다. 따라서 자아나 변치 않는 인격적 실체 따위는 없는 것이다. 흄은 확실히 감각적으로 경험한 진리만을 받아들이고 다른 모든 가능성을 열린 채로 놔 두었다. 그는 예수에 대한 믿음이나 기적에 대한 믿음을 반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두가지 경우에는 이성이 아니라 바로 믿음이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아기는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것에 대해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연법칙이 무엇인지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흄은 아기가 아직 자기 기대에 사로잡힌 노예가 되지 않았다고 말했을 것이다. 따라서 어린 아이는 선입견을 덜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기가 위대한 철학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볼 수도 있다. 아기에게 아무런 선입견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철학의 첫째 덕목이다. 아기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느낀다. 자기가 경험하는 것 이상의 사물에 얽매이는 일이 없다는 말이다. 훔은 습관의 힘을 논할 때 인과법칙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인과법칙이란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꼭 원인이 있음을 뜻한다. 흄이 한 사건이 다른 사건에 이어서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는 사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의식 속에 들어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우리가 자연법칙이나 원인과 결과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실은 인간적 습관에 대해 말하는 것이지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법칙이란 이성적이 것도 아니고 비이성적인 것도 아니다. 자연법칙이란 그냥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세계가 어떻고, 세상의 사물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관해 아무런 관심도 기대도 갖지 않고 태어난다. 세계는 늘 있는 그대로일 뿐이고, 우리는 그것을 차례차례 경험해 나가는 것이다. 우리가 자연법칙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잘못된 결론을 내릴 위험이 있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은 번개가 천둥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늘 번개가 친 다음에 천둥소리가 들리기 때문이다. 번개와 천둥은 단일한 방전 작용이다. 우리가 언제나 천둥이 번개 다음에 울리는 것을 채험한다 해도, 그것이 번개가 천둥의 원인이라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실제로는 제3의 요인이 이 둘을 유발한다. 시간적으로 뒤따라 생기는 사건들 사이에 꼭 필연적인 인과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철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사람들이 결론을 성급하게 내리지 않도록 경고하는 일이다. 흄은 또 윤리와 도덕에 관해서도 합리주의적 사고를 반대했다. 합리주의자들이 정의와 불의를 구별하는 능력은 인간의 이성에 내재한다. 우리의 말과 행동을 규정하는것은 감정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도록 자극하는 것은 감정이지 이성이 아니다.
흄은 모든 인간이 다른 사람의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공감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자신에게 방해되는 인물을 없애는 일이 늘 비이성적인 것만은 아니다. 어떤 목적을 이루려고 할 때 그런 일은 큰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다. '다른 사람도 삶을 사랑한다'는 서술적 명제로부터 '그러므로 그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규범적 명제를 결론으로 이끌어 냈다. 순수히 논리적으로 판단할 때 그것은 잘못된 추론이다. '많은 사람들이 탈세를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나 역시 탈세해도 좋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이것은 부당한 추론이다. 흄은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사실 판단으로부터 윤리적 판단을 이끌어 낼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우리는 어떻게 행위해야 할 것인지 이성을 통해 논증할 수 없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책임있는 행동은 이성을 예민하게 갈고 닦음으로써가 아니라, 도리어 타인의 고통과 행복을 같이 느낄 수 있도록 우리의 감정을 예민하게 갈고 닦음으로써 가능해진다.
논리적으로만 따진다면 '전세계의 멸망보다 내 손가락의 작은 상처를 더 염려하는 것이 비이성적이라 할 까닭이 없다'고 흄은 주장했다. 전쟁이서 끝난 뒤 많은 나치가 처벌을 받았지만, 그 이유는 그들 행동이 비이성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잔인했기 때문이다. 반면 정신상태가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고도 무죄 판결을 받는 경우가 있는데, 그 까닭은 그들이 사람을 죽이던 순간에 판단 능력이 없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판단능력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어떤 범죄자도 감정이 메말랐다'는 이유 때문에 무죄 판결을 받지는 않는다. 홍수가 나고 전염병이 만연해서 많은 이재민이 생겼을 때, 그 사람들을 도와 줄지 말지는 우리의 감정이 정한다. 만일 그 결정을 무정하게도 냉정한 이성에 먙겨 버리면, 우리는 어쩌면 모르는 체 하고 넘어가는 것이 인구급증으로 생기는 많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버클리
조지 버클리는 아일랜드의 주교였다. 그는 동시대이 철학과 과학이 기독교적 세계관을 위협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철저한 경험주의자였다. 세계에 대해 감각하는 것 이상의 것은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고, 세상의 사물은 우리가 감각하는 그대로지만, 그것은 실은 사물이 아니라고 먈했다. 그는 존재하는 것은 오직 우리가 감각하는 것 뿐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의 모든 관념의 원인이 우리의 의식밖에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 원인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정신적인 것이라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내 영혼이 내 관념의 원인일 수 있다. 모든 것은 정신에서 유래한다. 곧 정신은 만물 속에서 모든 것에 작용하고, 모든 것은 정신을 통해 존재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버클리에 따르면 우리가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이 신의 작용이라는 것이다. 신은 우리의 의식 속에 임재하면서 우리가 경험하고 의식하는 모든 관념과 감각을 의식 속에 불러 일으킨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우리의 체험 역시 우리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것일 수 있다. 버클리는 만물의 근거인 정신이란 바로 기독교의 신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