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데카르트는 1596년 태어나 일평생 유럽 각자를 여러 번 여행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인간과 우주의 본질에 대한 통찰을 얻으려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그는 철학을 배우고 난 뒤에는 다른 무엇보다 자기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되었다. 데카르트는 소크라테스처럼 이성만이 우리에게 분명한 인식을 줄 수 있다고 확신했다. 우리는 옛사람들이 써 놓은 것을 무조건 믿을 수 없다. 또한우리의 감각이 알려주는 것도 믿을 수 없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서 시작하여 아우구스티누스를 거쳐 데카르트까지 하나의 직선으로 이어져 있다. 이들은 합리주의자들이며 이성을 단 하나뿐인 확실한 인식의 원천으로 간주하였다. 데카르트는 폭넓은 연구 끝에 중세부터 전수된 지식을 무조건 신용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데카르트는 오직 내면 세계에서 혹은 세계라는 거대한 책속에서 지식을 구하려고 했다. 우리는 데카르트를 근대 철학의 창시자라고 부른다. 르네상스 시대이후 또 다시 동시대의 사유를 서로 연관된 하나의 철학 체계로 통합하려는 욕구가 생겨났다. 데카르트가 처음으로 체계를 세웠고, 그 뒤를 이어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로크와 버클리 그리고 흄과 칸트가 등장했다. 철학 체계는 근본적으로 철학의 모든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하나의 대답을 얻으려는 철학적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고대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체계 설립자가 있었고, 중세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기독교 신학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고 한 토마스 아퀴나스가 있었다. 이어서 자연과 과학, 신과 인간에 대한 낡은 생각과 새로운 생각이 뒤엉킨 르네상스시대가 열렸다. 17세기 들어 비로소 철학에서 다시 새로운 생각들을 하나의 체계로 묶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리고 이를 해낸 최초 인물이 데카르트다. 데카르트는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곧 우리 인식의 확실성에 관한 문제 연구에 몰두했다. 두 번째 중요한 문제는 육체와 영혼의 관계였다. 데카르트가 살아있을 당시의 새로운 자연과학은 자연의 진행과정을 매우 확실하고, 정확하게 기술할수 있는 방법을 발전시켰다. 데카르트는 또 철학적 성찰에 대한 확실하고 정확한 방법은 없는지 틀림없이 자문해 보았을 것이다. 자연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과정을 결정짓는 것이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유물론적인 자연관에 동조하고 나섰다. 그러나 물리적 세계를 점점 더 기계적으로 파악하면 할수록 육체와 영혼의 관계는 더욱 절실한 문제가 되었다. 17세기 이전 철학자들은 영혼을 대체로 모든 생물체에 흐르고 있는 생명의 정기로 인식했다. 영혼과 정신의 본래 의미는 생명의 입김이나 숨인데 이에 해당하는 말이 거의 모든 인도게르만 어족의 언어에 다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을 전체 유기체 안에 깃든 생명의 원리로 보고, 육체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17세기 처음으로 찰학자들은 영혼과 육체를 철저히 분리해서 동물이나 인간 육체를 포함한 모든 기계적 육체의 일부라고 할 수는 없다. 아니면 무엇일까?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철학자가 철학 문제를 어떤 방법으로 플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데카르트는 우리가 어떤 것이 참이라는 것을 명석하고 분명하게 인식할 수 없다면, 아무 것도 참이라고 간주헤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 복잡한 문제를 가능한 한 낱낱의 부분으로 많이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우리는 가장 단순한 사유에서 출발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이런 식으로 철학자는 단순한 것에서 출발하여 복잡한 문제로 사유를 전개해서 새로운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데카르트는 수학적 방법을 철학적 성찰에 적용하려고 했다. 그는 철학적 진리를 어느 정도 수학적 명제와 같은 식으로 증명하려고 했다. 우리가 숫자를 계산할 때 이용하는 똑같은 도구를 철학에 적용 하려고 하였는데 그게 바로 이성이다. 그는 자신의 철학연구를 시작하기에 앞서 예전의 사유를 모두 물속으로 던져버렸다. 데카르트는 바로 아무 것도 없는 상태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려 했다. 그는
자기가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있으며, 또한 이것이 자기가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는 인식에 도달하였다. 여기 그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그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의심한다면 그가 생각한다'는 것 역시 확실하다. 그리고 그가 생각한다면 그가 생각하는 존재라는 것 또한 확실하다. 그리고 그가 생각한다면 그가 생각하는 존재라는 것 또한 확실하다.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sum '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 한다.
데카르트는 완전한 존재의 관념은 완전한 존재 자체에서 나와야 한다고 했다. 즉 신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완전한 존재라는 개념에는 이러한 존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원의 관념 속에는 원주 위의 모든 점들이 원의 중심에서 같은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포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원이라고 할 수 없다. 태양과 달에 대한 우리 관념은 환영인지 모르지만, 외부의 현실도 우리가 이성으로 인식할 수 있는 몇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다. 길이, 넓이, 그리고 높이와 같은 측정할 수 있는 수학적 관계가 그것이다. 이것은 이성에게 나는 생각한다는 사실 만큼이나 분명하지만 색, 냄새, 맛 같은 질적 성질들은 우리의 감각기관과 얽혀 있는 까닭에 원래 외부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데카르트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종류의 현실, 다른 말로 두 가지 실체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펼쳐 나갔다. 하나는 생각 혹은 영혼이고, 또 하나는 연장延長 혹은 물질이다. 영혼은 의식의 능력일 뿐, 공간 가운데서 아무런 위치도 차지 하지 않는다. 더 작은 부분으로 쪼개지지도 않는다. 그에 비해 물질은 부피를 가지고 공간을 차지하며, 한없이 작게 쪼갤 수 있으나 의식이 없다. 데카르트는 두 가지 모두 신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라 말했다. 생각은 물체와의 관계에서 자유로우며 반대로 물질적 과정 역시 생각과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작용한다. 우리는 데카르트를 이원론자라고 부른다. 영혼은 인간에게만 있다. 동물은 전적으로 공간적 존재에 속한다. 동물의 생명과 운동은 전적으로 기계적이다. 데카르트는 영혼과 육체사이에 상호작용이 성립한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특수한 뇌의 기관을 통해 육채와 결합되며 이것을 통해 물질과 정신 사이에 지속적인 상호작용이 알어나게 된다. 그 상호작용 때문에 영혼은 또한 육체적 결핍에서 생기는 여러 느낌과 감각에 의해 혼란을 경험한다.
데카르트의 목표는 영혼에게 삶의 지배권을 주는 것이다. 우리 다리는 늙고 약해지며 우리의 등은 굽고 우리의 이는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속에 있는 이성이 임재하는 한 2더하기 2는 4이며, 또한 언제까지나 4로 남을 것이다. 이성은 늙거나 약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에게 이성 자체가 영혼이이었다. 그에 반해 욕구나 증오 같은 저급한 정념이나 기분은 육체적 기능과 밀접하게 결합된 것이며 따라서 공간적 현실과 밀접하게 결합된 것이다. 기계가 제 힘으로 운동한다는 것은 환상일 뿐이다. 시계는 사람이 조립하고 태엽을 감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그와 같이 인공장치들이 몇 안되는 부분들로 아주 단순하게 조립되어 있음을 강조하고, 그것을 사람과 동물의 육체를 구성하는 뼈, 근육, 신경, 근육, 혈관과 비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