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는 이십년동안 플라톤의 아카데미아를 다닌 플라톤의 제자다. 그는 아테네 사람들이 아닌 마케도니아 출신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아버지는 명망있는 인사, 자연과학자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최대 관심사는 자연이었다. 플라톤이 이데아에 빠져있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변화에 관심이 있었다. 그가 유럽 문화에서 갖는 의미는 오늘날 까지 시용되는 여러 학술어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여러 학문의 기초를 세우고 계통을 세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의 이데아를 우리가 '몇몇 말을 직접 눈으로 본 뒤에 만들어 낸 개념'일 뿐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말의 이데아 혹은 형상은 말을 경험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엔이러한 형상은 사물의 고유한 특성으로 사물 자체에 대체하는 것이었다.
플라톤은 우리 주변에 자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단지, 이데아 세계 및 사람의 영혼 속에 실재하는 원형적 존재의 반영이라고 간주하였는데 반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의 영혼 속에 있는 것은 자연적 대상의 반영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플라톤은 인간의 표상과 실제 세계를 혼동하는 신화적 세계상에 아직 사로잡혀있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은 형상과 질료의 통일이라 표현할 수 있는 서로 다른 낱낱의 사물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질료는 사물을 이루는 재료이며, 형상은 사물의 특성을 나타낸다. 질료는 형상을 얻을 가능성이 있다. 자연에서 생기는 모든 변화는 질료가 가능성의 상태에서 현실성의 상태로 변형되어 가는 과정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상과 질료에 관해 언급할 때, 그는 살아있는 유기체만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닭의 형상은 울음, 소리, 날갯 짓, 알을 낳는 것이지만, 돌의 형상은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다. 닭이 울지 않을 수 없듯 돌이 떨어지지 않을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에 내재하는 여러 인과관계에 대해 주목할 만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 이러저러한 원인에 대해 말하는 것은 하나의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느냐는 것을 문제삼는 것이다. 자연 안에는 여러 가지 유형의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그가 ‘목적 원인’이라고 부른 것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슨 의도로 어떤 목적을 위해 그런 짓을 했는지 묻게 되는 것이다. 그는 자연에서 볼 수 있는 물리적 현상에 대해서도 목적원인을 적용했다. 비가 왜 올까? 수증기가 냉각되어 물방울로 응고하고, 구름이 되면 무거워져서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비의 재료의 원인, 질료 원인은 대기가 차가워졌을 때, 바로 거기에 수증기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작용하는 원인, 작용원인은 수증기를 냉각시키는 일을 뜻한다. 그리고 형상적 원인, 형상원인은 바로 땅에 떨어지는 것이 물의 본성 혹은 물의 형상이라는 사실이다.
또 비가 내리는 것은 식물과 동물이 자라는데 빗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비의 목적원인인 셈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방울 하나에도 일종의 삶의 과제와 의도를 부여했다. 그는 삼라만상에 합목적성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오늘날 현대 과학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양분과 습기는 동물이 살 수 있는 필요조건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합목적성에 의해 사람과 동물이 살기 위해 물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주장 할 수도 있다. 이 경우는 신의 목적과 의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지, 자연에 내재한 의도와 목적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질료와 형상의 구분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인식방법을 설명하는 데에도 중요한 구실을 한다. 우리가 어떤 것을 인식할 때 사물들을 서로 다른 무리와 범주로 정리정돈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철저하게 정돈하려 했다. 정확한 질서를 추구해서 우리가 쓰는 개념 또한 체계적으로 정리 정돈 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식으로 논리학의 학문적 토대를 마련했다. 해답과 증명의 타당성 여부를 가늠하는 몇가지 엄격한 규칙을 세웠다. '모든 생물은 죽는다. 사람도 생물이다. 이로 미루어 사람은 죽는다'는결론을 얻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의 모든 것을 두가지로 분류했다. 돌멩이와 같이 영혼이 없는 사물들이 있다. 영혼을 갖지 못한 이런 사물들은 스스로 변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다른 한편 자연에는 스스로 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들이 있는 데 그것이 바로 생명체다. 그는 자연에서 영혼이 없는 사물에서 점차 생명체로 나아간다고 생각했다. 식물과 동물 그리고 사람을 통틀어 모든 생명체는 양분을 섭취하고, 성장하며 번식할 능력을 지닌다. 그 외에도 동물들에게는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또 사람에겐 사고력과 감각적으로 다른 것을 분류할 수 있는 능력도 있다. 우리는 단순한 식물에서 복합식물로, 단세포 동물에서 복잡하게 진화한 동물에 이르기까지 연속적인 이행이 가능함을 볼 수 있다. 이 사다리의 맨 꼭대기에 사람이 있다. 그는 사람은 신적인 이성의 불꽃을 지녔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인간이 훌륭한 삶을 사는데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 인간은 자기의 모든 능력과 가능성을 발휘하고, 이용할 수 있을 때 행복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의 세가지 형상을 믿었다. 첫 번째 형상은 쾌락과 만족을 누리는 삶이다. 두 번째 형상은 자유를 누리며 책임지는 시민의 삶이다. 세 번째 형상은 탐구하는 철학자의 삶이다.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 세 형상이 모두 필요함을 아리스토텔레스는 강조햇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에 대해서도 ‘중용의 도’를지키라고 했다. 비겁해서도 만용을 부려서도 안되며, 용감해야 한다. 인색해서도 안 되고, 낭비적이어도 안되며 대범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균형과 절제를 통해서만 행복하고 조화로운 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그리스의 의학을 떠오르게 한다.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무엇이든 정도를 지나쳐서 안된다'는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회관에서도 나타난다. 사회가 없다면 우리는 결코 올바른 인간일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인간을 정치적 존재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여러 가지 형태의 훌륭한 국가를 들고 있다. 그 중 하나가 한 명의 최고의 원수를 수반으로 하는 군주정치다. 군주정치가 휼륭하게 실현되려면 한 사람의 지배자가 자기 개인의 이익을 위해 국가를 주무르는 독재정치로 전락하지 않아야 한다. 또 다른 국가 형태는 귀족정치다. 소수인물이 통치권을 장악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세 번째 형태가 민주정치다. 그러나 민주정치도 나름대로 결점이 있다. 천민 정치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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