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성적인 수치감이 있을까? 가장 현명한 사람은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다. 올바른 인식은 안에서 비롯한다. 무엇이 옳은지 아는 사람은 옳은 일을 한다. 수침감이란 심리적 억제를 표현하는 진부한 단어다. 부끄러운 것에 심리적 저항을 느끼는 것이 본성일까? 어떤 것이 본성이라는 것은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들어맞는다는 것을 뜻한다. 모든 인식은 어떤 시점에 밖에서부터 사람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엄마는 아이에게 지식을 주입하려 애쓴다. 우리는 어떤 것을 갑자기 깨닫고 이해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위대한 그리스 철학자는 각각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다. 이 세 철학자는 유럽문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자연철학자들은 소크라테스 이전에 살던 사람들인데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라고 표현한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태어난 첫 철학자이다. 소크라테스 때부터 아테네는 그리스 문화의 중심가 되었다. 그 당시 아테네의 문화적 특징을 잘 보여 주는 사상가들이 소피스트들이다. 기원전 450년 경 아테네는 그리스 문화중심지였다. 자연철학자들은 무엇보다 자연연구가였다. 이들은 과학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때 아테네에서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사회적 위치에 사람들의 관심이 쏠렸다. 아테네는 의회와 법원을 설립해 민주주의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사람들이 민주주의 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충분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점을 전제한다. 그리스 식민지 곳곳에서 유랑하던 선생과 철학자 한 무리가 아테네에 찾아들었다. 이들을 바로 소피스트라고 부른다. 소피스트라는 말은 전문지식을 가진 학자를 뜻한다. 이 소피스트들은 아테네 시민을 가르치면서 생활비를 벌었다.
소피스트들은 어느 면에서 자연철학자와 공통점이 있었다. 이들도 신화에 비판적인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소피스트들은 불필요한 철학적 사변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모조리 거부했다. 철학에서는 이런 철학적 주장을 회의주의라고 한다. 자연의 모든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무엇인가를 배워야 하고, 남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인간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소피스트들은 인간 존재와 인간의 사회적 삶에 더욱 관심을 쏟았다. 소피스트였던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말했다. ‘신에 관해 나는 아무것도 단언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여러가지가, 즉 존재의 어둠과 인생의 짧음이 신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신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자기로서 분명한 것을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을 '불가지론자'라고 한다. 소피스트들은 여러 곳을 다니면서 각가지 다른 정부 형태를 볼 수 있었다. 여러 도시국가가 지닌 윤리와 관습, 그리고 법은 서로 아주 달랐다. 소피스트들은 무엇이 자연적인 것인지, 또 무엇이 사회가 만든 것인지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수치심은 천부적인 것일까? 아니면 사회가 조성한 것일까? 무엇보다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은 사회윤리및 사회관습과 관계가 있다. 유랑하던 소피스트들은 옳고 그름에 대한 절대적인 규범은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들 생각에 반대해서 소크라테스는 실제로 몇몇 규범은 절대적이며, 보편 타당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이려고 노력했다.
소크라테스는 단 한줄의 글도 남기지 않았지만 유럽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태어나 거의 모든 이와 대화를 할 수 있는 시장 바닥과 거리에서 평생을 보냈다. 소크라테스의 생애는 그의 제자이며 위대한 철학가로 손꼽히는 플라톤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졌다. 플라톤은 '대화편'을 저술했는데 여기서 소크라테스를 등장시켰다. 소크라테스는 먼저 문제만을 제기하고선 자신은 마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태도를 즐겨 취했다. 그러고는 대화를 진행하는 동안 종종 상대방이 자기 생각의 허점을 깨닫도록 유도했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결국 무엇이 옳고 그른지 깨닫도록 했다. 그의 어머니는 산파였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철학적 문답법을 조산술에 비유했다. 산파가 스스로 아기를 낳는 것이 아니라, 남의 출산을 돕기만 하는 것처럼 소크라테스의 임무는 사람이 올바른 통찰력을 얻도록 도와주는 것이었다. 자신의 내면에서 생긴 인식만이 참된 통찰력이다. 자신이 임신을 해야 제 아이를 얻을 수 있듯이 우리도 자신의 이성을 발휘할 경우에는 철학적 진리를 통찰할 수 있다. 사람이 이성적이 되면, 자신의 내면에서 무엇인가를 끌어낼 수 있다는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아무것도 모르는 상대역을 해냄으로써 다른 사람이 어쩔수 없이 자신의 이성을 이용하도록 유도했다.
도시 한복판 광장에서 소크라테스를 만난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모욕 당하고 웃음 거리가 될 수도 있다 는 것을 뜻햇다.이렇게 볼때 소크라테스는 동료시민에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시권력자에게는 성가시고 신경에 거슬리는 존재로 여겨졌다는 사실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는 게으른 암말과 같다. 그리고 자신은 깨어있는 의식을 위해 말 옆구리를 찌르는 등에 같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를 망치고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고소당했다. 오백명의 배심원 으로 구성된 법정에서 간신히 반수가 넘는 배심원이 소크라테스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예수와 소크라테스 사이에는 여러 가지 유사점이 있다. 자신의 말을 글로 남겨 놓지도 않았다. 우리는 이들 제자들이 전해주는 내용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 두사람은 문답법의 거장이었다. 그들은 모든 형태의 부정과 권력남용을 규탄하면서 사회의 권력자들에게 도전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소크라테스도 소피스트와 마찬가지로 자연철학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사회적 위치에 더욱 철학적 관심을 기울였다. 몇백 년 후 로마 철학자인 키케로는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하늘에서 땅으로 불러내려 각 도시와 집집마다 보금자리를 틀게하고, 사람들이 인생과 윤리, 선과 악에 관해 깊이 생각도록 했다‘ 고 말했다. 소크라테스는 중요한 점에서 소피스트들과 달랐다. 그는 자신을 학자나 현인이라고 자처하는 소피스트로 생각하지 않았다. 소피스트와 달리 가르치고 돈을 받지 않았으며 스스로 참된 철학자라고 칭했다. 철학자는 자신이 근본적으로 '아주 적은 것만 알고 있다'는 점을 정확히 알고 있다. 바로 그 때문에 그는 거듭 참된 인식에 도달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철학자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깨듣는 사람들이다. 또 그러한 사실이 그 자신을 괴롭힌다. 그렇게 보면 철학자는 거짓된 지식을 뽐내는 이들보다 훨씬 현명하다. 가장 현명한 사람은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내가 알고 있는 단 한가지는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라고 했다. 묻는 사람은 권력자가 볼때 가장 위험한 인물이다. 대답하는 것은 위험하지 않다. 수천 가지 대답보다 그저 질문하나가 많은 불씨를 안고 있을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마음속으로 신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고 믿었다. 그 양심의 소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말해 주었다. ‘무엇인 선인지 아는 사람은 선을 행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올바른 인식은 올바른 행동을 유도한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그릇된 행동을 하는 것은 우리가 더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원전 5세기 초반 아테네인들이 페르시아인들과 맞서 싸운 끔찍한 전쟁이 있었다. 페르시아 전쟁이다. 이 시기에 소크라테스가 거리와 장터를 두루 돌아다니며 아테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아테네에 파르테논 신전이 있다. 동정녀의 집이라는 뜻이다. 아테네의 수호신인 동정녀 아테네 여신을 숭배하기 위해 세운 신전이다. 그리고 디오니소스 극장이 있다. 소크라테스 시대 이 극장에서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그리고 에우리피데스 같은 위대한 비극 작가들의 작품이 공연되었다. 희극도 상연되었다. 가장 유명한 희극 작가가 아리스토파네스였다. 그는 소크라테스를 신랄히 풍자하는 희극을 썼다. 아테네시가 내려다보이는 아레이오스 파고스라는 언덕이 있다. 이곳에 있던 아테네 최고 법정이 있었고, 수 백년 후에 이 곳에서 사도 바울이 아테네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기독교에 관해 설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