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를 공부해서 외국에 나가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경제나 문화를 공부해서 기획안을 작성할 때 활용하고 싶은 사람, 정년이 다가오니 철학이나 종교를 다시 공부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터이다. 공부라는 말 하나에도 이렇듯 다양한 요구가 숨어있다. 공부하려는 생각에는 자신을 변화시키고 싶은 바람이 숨어 있을 수도 있고, 마음속 어딘가에 자신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공부에 대한 소망이 있을 수 있다. 요즘처럼 공부하기에 좋은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뭔가가 궁금해지면 곧장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공부할 수
있으니 말이다. 시중에는 질 좋은 입문서도 많이 나와 있다. 인터넷 기사든, 종이 책이든 현대에는 일단 가독성이 중요하다. 현대는 그야말로 공부의 유토피아이다. 하지만 정보가 많은 만큼 한편으로는 생각할 여유를 빼앗기고 있다. 2000년대 말부터 확산된 SNS와 스마트폰은 우리 생활을 극적으로 바꿔놓았다. 오늘날 스마트폰을 가지고 다니는 우리는 어디에 있든 인터넷의 정보자극 때문에 정신을 집중하기 어렵다. 마치 빛과 소리의 연타처럼 깊게 생각할 새도 없이 과잉정보가 마구 쏟아진다. SNS를 통해 끝도없이 흘러드는 정보를 접하면, 우리는 무심코 좋은지 불쾌한지 한가지 감정으로 먼저 반응한다. 공감, 이것은 바꿔말하면 집단적 동조다. 사고하기도 전에 동조하는지부터 묻는 것이다.
가만히 멈춰서서 생각해보고, 나는 이것을 공부했다고 주저없이 말할 수 있는 경험을 만들어야 한다. 공부를 유한화하는 것이다. 깊이 공부하다 보면 벽에 부딪힐 때도 있다. 깊이 있는 공부에는 그런 위험이 내재한다. 그러니 지금 사는 방식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인생을 살고 있다면 깊이 공부하지 않는다. 안 해도 괜찮다.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 최고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술은 공부하여 익힌다. 기본은 읽기, 쓰기, 계산이다. 돈을 벌려면 일의 기술을 습득해야 한다. 인간관계를 파악하는 것도 공부다. 깊이 공부하지 않아도 인간은 살아갈 수 있다. 깊이 공부하지 않는 삶은 주변에 맞춰서 움직이는 삶이다. 나를 주변 상황에 잘 맞추는 삶, 즉 동조에 능한 삶이다. 반대로 깊이 공부하는 것은 흐름속에서 우뚝 멈춰 서는 것이다. 즉 동조에 서툰 삶이다. 깊이 공부하는 것은 동조에 서툴러지는 것이다. 공부는 아무에게나 닥치는 대로 권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부터 설명할 내용은 과거와 비교하여 동조 능력이 떨어지는 단계를 거쳐, 새로운 동조를 실행하는 사람으로 변하는 꽤 시간이 걸리는 깊은 공부를 하는 방법이다. 공부를 하는 목적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바보가 되는 것이다. 먼저 알아두어야 할 것은 '공부란 획득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공부란 '상실'이다.
우선 기존의 자신에게 새로운 지식과 스킬이 더해지는 것이 공부라는 생각부터 버리기로 하자. 공부란 오히려 자신을 파괴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공부하는가? 바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이다. 바로 지금까지 해온 동조에서 해방되는 자유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주변에 동조하며 살아간다. 회사나 학교, 친구, 가족 등 환경에 나를 맞춘 후 그곳에서 겉돌지 않으려고 애쓴다. 우리는 동조압박을 통해 가능성의 범위를 제한 받았다. 자유롭지 못했다. 바로 그 한계를 뚫고 인생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젖히기 위해 깊은 공부를 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왠지 떨쳐내기가 쉽지 않다. 그 동안 익숙한 환경에서 그 환경에 어울리는 것에 동조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인간은 보통 아는 것이 많아지면 대담하게 행동하기가 어려워진다.
공부는 오히려 하면 손해가 되기도 한다. 달리 말하면 공부란 일부러 동조에 서툰 사람이 되는 일이다. 자유롭지 못하다고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부자유가, 속박이 쾌락의 원천이 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대단한 점이다. 싫은 일을 할 때도 아주 조금 이라도 즐거움을 찾으려 노력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정신분석학에서는 마조히즘이라고 부른다. 내가 살아가는 지금의 삶은 운명적이다. 힘을 내서 살 수 밖에 없다는 신념이 삶을 지탱할 때도 있을 터이다. 옳고그름을 논하기 전에 이것은 마조히즘이라 할 수 있다. 완전한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무리 힘들고 자유를 찾아서 도망친다해도 그것은 견딜만한 범위 안의 환경에서 나와 부자유한 다른 환경으로 옮겨가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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