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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들려주는 작은 철학 ( 롤란트

마지막 고찰

이마뉴엘 칸트는 철학이 네가지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고 하였다.  첫째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둘째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셋째 '우리는 무엇을 희망하는가?'  마지막으로 이 세가지를 종합하여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다. 우리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노력하여 얻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였다. 지식은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지만, 우리가 사는 세계에 익숙해지기 위해 모든 것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세계에 대한 지식을 얼마나 넓게 추구할 수 있는가와 상관 없이 지식의 기초는 항상 우리가 사물로부터 얻는 경험이다. 우리는 경험에 의해서 사물의 본질을 규정한다. 경험과학은 생활세계의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이미 오래전에 이 바탕을 넘어서기도 했다. 우리 지식은 그 끝이 어디일까? 우리는 모두 사물을 그것이 다른 사물에게 끼치는 작용에 따라서 규정하기 때문에 우리의 지식은 현실적인 것의 연관이 닿는 데까지 연장될 수 있다.  우리의 모든 지식은 일시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완전하도록 보완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지식 확장을 보장하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은 세계의 관찰자일 뿐 아니라, 1차적으로 행동하는 존제이다. 인간 역사의 모든 시대를 통해 계속 되풀이 되어 온 하나의 원칙이 있으니 바로 '상호성의 원칙'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의 이기적 행동에 의해서 희생되지 않는 한에서 자신에게는 이롭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해를 끼치는 행동들을 포기할 용의가 있다.  평등과 정의, 공정함의 원칙이 한 사회 조직의 토대가 될 때, 모든 인간에게 똑같이 정의로운 사회가 나타날 수 있다. '남이 너에게 행하기 원치 않는 것을 너도 남에게 하지 말라라'든지, 혹은  '너의 행동의 원칙이 보편적 법칙일수 있도록 행동하라'고 한 칸트의 정언명령이 그런 것들이다중세 귀족사회에서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불평등한 권리를 갖고 있었지만, 그들은 이 질서가 신이 내린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사회에 순응하였고, 이를 인습으로 물려주었다. 독재체제가 역사에 등장한 20세기에는 수많은 권력자들이 나타났는데 사람들은 '무조건 명령만 내리소서.우리가 따르겠나이다'라고 외칠 정도였다.

 

인간은 무엇을 원할까?  행복이다.  두려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불행, 절망, 그리고 죽음이다.  계몽주의시대의 유럽사회에서는 인간의 의식과 인본주의가 증가하였으며, 그것은 산에 대한 표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우리의 세계 외에도 더 많은 세계들이 존재한다면, 세계의 의미에 대한 우리의 질문은 그런 사실로부터 과연 어떤 결과를 얻어낼 수 있을까?  우리가 무언가를 바란다면,  우리는 그것을 우리 자신에게 기대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 스스로가 모든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인간의 세계를 건설해야 한다는 뜻이다. 고대철학자들은 이미 인간의 본질을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로고스(이성, 언어)를 사용하는 생물이고 이성을 타고난 생물이며 폴리스(도시) 와 국가를 이루고 사는 생물이다.  에피메테우스에게는 인간에게 자연적 재능들 모피라든가, 갑각, 발톱, 날카로운 이빨 같은 것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기술과 발명, 정치술의 신적 능력을 마련해 준 것이다.

 

인간은 세계의 창조자는 아니지만 만물의 척도다.  인간은 말의 창조자이며 개념의 창조자이고 지식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공동생활을 조직하며 선의 이념을 발전시켰고,  이와 아울러 전체 세계를 자신의 척도에 따라 판단한다. 인간은 자신을 출발점으로 삼아 가장 큰 것과 가장 작은 것을 찾는다. 인간의 세계, 그것은 인간 삶의 의미 있는 세계이다. 또한 인간은 유적존재로서 자기자신의 창조자이기도 하다. 인간은 판단할때 기준이 되는 이 상상을  스스로 설정하기 때문에 결국 자기자신을 창조하는 셈이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더 이상 찰학의 시대가 아니라, 철학이 해체될지도 모르는 과학의 시대이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을 이성을 타고난 생물의 표상에 의심을 표명하였다. 그들은 인간이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일은 드물거나 거의 없고, 비합리적으로 다시 말해서 순간적인 감정이나 열정, 불안감에 의해 행동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메피스토펠레스의 입을 빌려 한 말도 이와 모순되지 않는다. 인간은 자기를 짐승보다 우월하게 해준 이성을 사용하여 짐승보다 더 짐승 같이 된다.  현실의 인간은 사회적 출신의 산물이라고 설명하면서 인간의 판단 능력을 의심하였다.  인간의 자기인식과 철학에 의한 계몽주의는 인간 스스로 초래한 미성숙 상태로부터 인간을 끄집어 낼 수 있는 수단으로 여젼히 간주되었다인간이 모든 영역에서 현실을 조망케함으로써 독자적인 판단능력가지게 하는 것은 고대 문명이래로 모든 교육의 이상이었다.  세상에 대한 개념이 아직 없는 어린아이가 자라서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것처럼 결국에는 또다시 어리석은 상인이 되고 만다면,  독자적 사고를 위한 교육은 실패한 것이다.

 

사회학이 보여준 것은 누군가 더 좋은생각을 머릿속에 주입하지 않으면, 경직된 사회적 역할과 천편일률적인 사고속에서, 그저 인습에 따라 아무 생각도 없이 미몽의 상태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이다.  우리 인간이 동물계에서 유래하였더라도  그 사실이 우리를 훌륭한 존재로 고양시키는데 무슨 방해가 된단 말인가? 사실 우리가 이성적 존재인가?  최소한 이성적 존제일 가능성이 있는가, 아니면 원숭이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의 생물학적 기원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18세기 계몽주의자들은 자율적이고 이성적인 인간주제를 이상적 인간상으로 구성하였으며, 20세기 인간들은 인간이 동물들보다 더 야수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잔학행위를 위해서 자신의 기술적, 과학적 이성을 사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짐승에서 신까지 전체 스펙트럼을 구현 할수 있는 생물이다. 철학은 인간의 도덕적 책임과 의무들에 대해서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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