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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들려주는 작은 철학 ( 롤란트

행복은 어떻게 계산할까?

의무의 윤리를 주장하는 의무론자들이 다른 한편에는 계율과 규칙의 결과를 묻는 목적론자들이 자리잡고 있다. 순수의무론자들은 모든 의무는 절대적 의무로서 어떠한 예외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입장에서 출발하였다. 칸트는 의무론자였다. 우리는 어떤 점에서 의무론자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 그는 계율과 의무들에 순서를 정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자기 행위의 결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는 모든 의무 조항들을 문자 그대로 지킬 때 자신이 정직하다고 믿는다.  순수한 지조가 그에게 행위를 결정하는 유일한 척도이다. 이 사람들을 지조의 도덕가라고 한다.  그는 자신의 선량한 양심이 엄청난 파국을 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거나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목적론자들의 논증은 달랐다. 그들은 모든 계율에는 목표가 같다는 것을 옳게 인식하였다. 그 목표는 인간 공동의 삶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 상태가 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인간의 행위들을 그 결과에 따라 판단하였으며 행위는 그 결과가 선할 때 허용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한 인간의 행동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결과를 낳는다. 그러므로 어떤 행동을 선하다고 할 것인가, 악하다고 할 것인가는 다른 사람에게 끼친 결과에 따라 결정된다. 어떤 행위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 행위에 연루된 모든 사람들의 이익과 피해를 전부 계산해야 한다는 생각은 공리주의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공리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첫 눈에 명확히 보여주는 하나의 명제를 행동의 지침으로 내걸었다. 그것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다. 원하는 행복의 상태가 가까운지 멀리 있는지, 또 기대한 것이 이루어질 때 동반될 수 있는 안전이나 위험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어떤 행동에 관련된 사람들 각자에 대해서 개인적 차원의 손익계산이 이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취향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벤담은 쾌락의 서열을 정하지 않고 이것을 개인에게 맡겨서 각자 저마다의 가치 기준을 이용하게 했다영국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이러한 무차별성에 반대하면서 육체적 향유는 정신적 희열보다 낮은 단계에 있다확정하였다. 사람들은 의식주, 여행 등의 순서로 육체적 필요를 먼저 생각하며, 그리고 난 다음에야 교양이나 문화의 차례가 된다. 라이프니츠의 신은 공리주의자이며,  행복의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 행복과 거의 같은 무게의 불행을 감수하는 구제할 길 없는 회계원이다. 한 인간의 생명을 보호할 수 있다면 당연히 거짓말을 해도 된다고 하는 것은 공리주의자에게나 현명한 인간들에게는 문젯거리도 아니다. 여러사람이 생명이 걸려있는 계산일 경우엔 어떻게 할 것인가?

 

1 백 명의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99명을 희생시켜도 좋을까?  우리가 49%의 악과 51%의 선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위대한 창조라고 찬양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행동에 대해서도 그렇게 판단하는 것이다. 행복이 한쪽의 고통을 대가로 다른 한쪽에게 주어지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선한 원리로 볼 수 없고, 악으로부터 선을 만들어 내야 하는 궁여지책으로 여길 뿐이다. 물론 사회의 구성원들과 전체 사회, 정부는 거의 항상 공리주의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이 발칸반도에서 일어난 내전의 참혹함에 대해 경악하면서 비극이 개입하기를 바란다. 사람들은 희생자들을 동정하고 또 평화와 인류애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 강력한 조치들이 있기를 요구한다. 정치가들은 반대로 그렇게 개입했을 때 드는 비용을 계산하고,  평화를 수호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너무 바싸고 또 너무 위험하다는 결론을 얻는다. 그래서 그들은 내키지 않는 정책을 수행하고 비용을 의식하여 되도록 요리조리 빠져나가면서 조금만 인간적인 되려고 노력한다.

 

현대 국가는 해결해야 할 수많은 과제들을 안고 있으며, 그것은 돈을 요구한다.  국가는 이 돈으로 세금을 마련한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학 위한 사회복지정책으로 흘러들어간다.  이제 정부는 이 돈이 가난한 사람에게서 의미있게 쓰이는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돈으로 무얼하는가? 그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돈을 사용한다.  돈을 써 없애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부자에게 돈을 준다고 생각해 보자. 돈을 굴려서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보다 더 강력하게 국가경제를 활성화 한다. 그래서 사회 에서 구성원들의 불평등이 심화되면 사회 전체는 더 부강해 질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와 모순된다. 인원을 초과한 구명보트에 탄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죽음에 몸을 던져야 한다.  배에 탄 사람들은 아직 앞날이 창창한 청년과 기대할 것이 없는 노인, 아이를 가진 젊은 엄마, 부랑자, 그리고 노벨상 수상자 다섯이다. 누구를 물로 던져야 할 것인가? 여기 모든 사람에게 개인이 당할 생명을 잃는 고통은 똑같기 때문에 배에 탄 이들 전체를 참작하여 어떤 식으로든 개개인의 가치를 규정해야 할 것이다이렇게 되면 부랑자와 노인은 나쁜 카드를 쥔 셈이다.  아이를 가진 엄마와 청년은 유리하다. 노벨 수상자는 어떨까?

 

유용성의 관점에서만 인간을 판단해서 가장 쓸모없는 사람을 버린다는 것이 좀 그렇다. 이 문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제비뽑기를 제안했다. 다시 말하면 우연이나 운명, 혹은 신의 뜻대로 결정하는 것이었다. 이런 방법의 장점은 뭘까? 사람이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제 몸을 희생하겠다고 나선다면 어떨까? 우리에게는 순수한 두가지 테도와 원칙이 있다.  어떤 결과가 발생하든 상관없이 절대적 의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의무론적 윤리와 오직 현명한 계산만 내세우면서 정의와 선을 놓쳐버린 공리주의 원칙이 그것이다. 우리는 지조의 도덕가들에게 행동의 결과도 고려하도록 강요해야 하며, 공리주의자들에게는 계산에도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세상에는 계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될 가치들이 있는데 인간의 생명이 그런 것이다. 우리는 사회 전체를 더 부강하게 하는 큰 이익을 남길 수 있다는 이유로, 그 누구에게서도 삶에 필요한 것을 빼앗아서는 안된다. 의무론자들은 규칙을 엄격하게 지켜야한다고 고집하는데,  이 규칙은 자의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는 원리에 따라 인간의 태도를 조절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규칙을 지켜야 한다. '우리 자신이 대접받고 싶은 대로 다른 사람에게 공손하고 정중하게 대접해야 한다'는  이 간단한 원칙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옛 히브리인들은 처음에는 10개의 계울을 가지고 읽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우리의 삶이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상황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규칙을 문서로 작성하기 시작하면서 두꺼운 책이 되었다.  이 복잡 다양한 규칙들의 기본 뜻은 명백한 한 가지이다.  그 이름을 붙여본다면 선의 이념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안에서 정의를 글로 옮긴 것, 즉 성문화 한 것이 법문서들인데, 시람들은 이들 전부를 미리 읽지 않고도 두려움없이 거리로 나가서 서로 평화롭게 교류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양한 사회체제에 속해 있으며,  체제마다 옳다고 생각하는 선한 사람의 이념은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온갖 수단을 다하여 싸우는 것이다. 선이 그렇게 간단히 인식될 수 있다면, 왜 사람들은 그에 걸맞게 행동하지 않을까?  이를 설명하려면 지금까지 우리 인간은 올바른 사회 형태를 얻기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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