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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들려주는 작은 철학 ( 롤란트

예술, 행복

어떤 학문이 의미에 대한 문제를 모색한단 말인가? 이런 문제를 논의한 것이 정신과학이다. 인간 정신의 작품에 속하는 것은 회화와 조각, 음악, 문학 등  예술작품들과 철학적 사유구조들, 건축물들, 기계와 같은 기술의 걸작들, 과학이론들,  그리고 역사적 행위들이다.  사람들은 전에 창조신을 천재적인 건축가, 화가, 조각가, 기술자, 학자 등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남는 것은 인간으로서 천제적인 건축가, 화가, 조각가들이다.  우리는 예술작품들 속에서 외적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 완전성, 즉 절대가치를 찾게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우리는 예술작품들이 존경받을 수 있는 공간으로 신전들을 건설하는 것이다.  그 신전을 우리는 박물관 혹은 예술의 전당이라고 부른다. 박물관을 무제움museum 이라고 하는데 이 이름은 예술의 여신 뮤즈를 섬겼던 고대의 신전 무제이온museion에서 온 것이다.  예술과 정신의 창조는 우리가 창조신에 대해 말하는 무에서 유를 창조와 거의 비슷하다.

 

고대 로마인들은 거창한 생각을 했다. 그들은 큰 건물을 하나짓고 그안에 그들이 아는 모든 신들의 조각상을 세워놓았다.  이 건물이 판테온이다.  인간은 신의 상실을 고통스러워한 나머지 신적인 것이라는 표상만큼은 간직하였다. 하지만 신적인 것은 인간이 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에 대한 학문신학은 인간에 대한 학문인 인간학으로 뒤바뀌게 되었다. 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는 성서에 나오는  ‘신은 자신의 형상에 따라 인간을 창조하였다’라는 문장을 뒤집어서 '인간은 자신의 형상에 따라 신을 창조하였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수학에서 하나의 등식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을 수도 있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는 이미 인간이 신을 믿을수 없게 되면, 이 세계에서 버림받은 것처럼 느낄수 밖에 없다고 말한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태어나서 살다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인간은 무에서 와서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갑자기 존재하고,  삶 속에 있으면서 삶의 온갖 강요 속으로 연루 되어야 한다. 그들은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고 성공하기도 하고 실폐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삶을 영위하기 위해 끊임없이 걱정하고 한편으로는 죽음에 대해 불안해 한다. 알던 사람들을 잃고나서 슬퍼하고,  어느 날엔가는 그들도 역시 죽어서 다시 무로 사라져야 한다.  행복한 결말이 없는 이야기다.  종교에서는 물론 신이 위로와 구원, 그리고 영원한 축복의 약속을 통해서 인생모험의 행복한 결말을 가능케 하는 역할을 맡았었다. 모든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에는 자신의 종말을 알지 못한다.  이런 불확실성이 인간의 행복을 갉아먹는 것이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현명한 격언 하나를 뚜럿이 남겼다. '죽은이가 아니면 그 누구에 대해서도 행복하다 부르지 말라' 그리스인들이 중요하게 인식한 것은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이 외부적 현상들에 좌우될 뿐 아니라, 마음속의 소망과 기대에도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스토아적이라는 말은 스토아철학자들의 인생관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오늘날에는 그 무엇에도 동요되지 않고, 모든 것을 스토아적인 태연함으로 견뎌내는 사람의 태도를 지칭한다. 이와 반대로 에피쿠로스는 인간은 삶이 제공하는 모든 아름다움을 충분히 즐겨야 한다는  견해를 주장함으로써  스토아 학자들의 비난을 받았다.  인간이 사회의 큰 사건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은돈하다시피  자신의 삶을 설정해야만 정치와 사회의 변동에 의해 방해받는 일 없이 개인적인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것이 바로 고대철학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두가지 서로 다른 행복론이다. 두 경우에서 중요한 것은 순수히 현세적 차원에서 삶을 극복하는 것이다. 

 

실제로 철학이론들로부터 신의 존재가 사라져버린 후, 찰학자들은 인간의 삶의 철학을 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생각이 19세기에 실존철학이라는 이름으로 형성되었으며, 실존철학의 터를 닦은 이는 덴마크인 쇠렌 키에르케고르이다.  그는 아버지가 저지른 죄 때문에 신이 자기를 벌하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 속에서 평생을 살았다. 그리스인들은 운명이 눈멀았다고 생각했다. 운명은 예기치 못하게 닥쳐오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만나고, 어떤 사람이 면할지 알 수 없다. 그에 반해서 키에르케고르는 가학적인 신의 보복을 두려워했다.  키에르케고르의 ‘불안의 개념’ ‘공포와 전율’  ‘죽음에 이르는 병’ 같은 작품들은 어느 불행한 인간의 탄식으로 읽을수 있다.  20세기의 다른 실존학자들도 바로 이러한 문제를 철학의 중심 테마로 삼았다.  그들은 존재로 '내던져짐'에 대해 말한다. 그들은 인간이 여러 계획을 만듦으로써 삶의 기획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삶의 매 단계에서 이러한 위험을 직시해야 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니다.  시인 고프트리트 벤은 이렇게 악의에 찬 격언을 남겼다. '어리석은 채 일만 하는 것, 그것은 행복이다'.

 

우리들 현재의 삶을 살펴보면 이 말을 수긍하게 될 것 같다. 사람들은 자의든 타의든 간에 일할 때나, 휴식할 때나 어리석을 정도로 바삐 몰두하면서 삶의 문제들로부터 관심을 돌린다. 그리고 거의 예외없이 물질을 소유하고 소비하는 데서 행복을 찾고 있다. 철학자들 그중에서도 문명비평가들과 실존철학자들은 이런 문제를 보았고, 소외라는 주제로 이 문제를 상세하게 논구하였다. 여기서 소외란 '인간이 자신의 본질과 규정으로부터 멀어져서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가 그릇된 삷의 기회속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뜻한다. 인간의 사명은 무엇인가? 인간 실존에 부과된 것이 무엇인가를 햄하는 것, 그것은 실존철학의 관심사이기도 했다. 그러나 운명에 의해 망가지기 쉬운 인간실존을 분석했을 때 어떤 결과를 얻었을까?  20세기 철학자들도 원칙적으로는 고대 철학자들보다 더 나은 답을 구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인간 삶의 비극성을 대단히 풍부한 언어로 묘사하였다.  인간이 자신과 타인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어떤 의미를 자신의 삶에 부여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