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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 그 창조적인 역사 (피터 투이

권태로 돌아가는 긴 여정(2)

권태는 남는 시간 관리와도 관계된다. 권태를 해소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남는 시간을 알차고 즐겁게 보내는 것이다.  이 즐거운 자유시간을 여가 시간이라고 하자. 여가의 정의와 활용법에 대해 아직까지도 아리스토텔레스만큼 현명한 답을 내놓은 사람이 없다. 여가 시간을 즐거운 활동이고,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야 한다또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가 있어야 하고 신체 그리고 특히 정신을 사용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즐기는 여가활동중 이 조건을 두루 만족시키는 건 무엇일까?  여행일까?  아니다. 여행은 보통 일에서 해방 되고자하는 목적이 있다. 그렇다면 텔레비전 시청은?  이게 과연 여가 생활일까?  절대 아니다.  머리와 몸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스포츠는?  가끔은 여가생활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경쟁에 몰두하다보면 머릿속에 목적, 그러니까 상대방을 패배시키겠다는 목적이 생겨난다. 그렇다면 섹스는?  출산을 위한 목적이 없다면 여가생활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딜가나 인기 있는 에어로빅 운동은? 그로 인해 신경가소성이 촉진되긴 하지만 정신이 관여된다고 하긴 어렵다.  그렇다면 대화는?  별 생각없이 이루어질 때가 많으므로 아니다.  카드놀이나 보드 게임은? 좋은 후보다. 카드놀이와 보드게임도 스포츠와 마찬가지다. 모두 목적이 없어야 한다.

 

종교개혁 이래 우리는 어떤 활동이 가치가 있으려면 실용적이어야 한다는 믿음을 지녀왔다. 게다가 가치가 있으려면 더 나아가 도덕적이어야 한다.  그동안 이 믿음이 강조된 덕분에 여가 역시 그 본질이 변질되어 도덕성과 실용성을 따지게 된다. 그러다보니 이러이러한 여가활동은 몸이나 정신에 이롭기 때문에 또는 신에게 이롭기 때문에, 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들 이야기하게 되었다.  유명한 독일계 미국인 문화 비평가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여가이론으로 널리 이름을 알렸는데 프로테스탄티즘을 넘어 서서 이야기를 끌어간다. 그는 독특한 에세이 ‘자유시간’에서 TV, 일광욕,  휴일캠핑, 권태를 심상치 않게 조합시킨다.  그가 보기에 자유시간을 지배하는 요인은 바로 상업화다. 그는 자유시간도 일하는 시간과 마찬가지로 상업화의 원리를 따른다고 생각한다. 즉 일을 하면 이윤이 생기듯 자유시간에도 이윤이 생겨야 한다는 원리다. 그는 나와 같은 북미인들이 자유시간에 거금을 쏟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어쩌면 그 때문에 우리가 휴일만 되면 자주 따분해하는 건지도 모른다고 그는 덧붙인다.  대부분의 현대인은 자유시간을 다시 일하는 시간으로 사용한다.

 

여가생활은 실용과 도덕과는 무관해야 한다. 또 즐겁고 사교적이어야 한다.  이 모든 게 권태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요즘의 여가개념은 일과 너무 결부되어 있어서 결국엔 권태가 끼어들 것 같다. 왜 안 그렇겠는가? 일이 권태롭다고 하면, 일의 연장선인 여가 역시 권태로울 수 밖에 없다. 여가시간이 권태에서 자유로우려면 실용적인 도덕적인 또는 상업적인 목적이 전혀 없는 활동으로 채워져야 한다. 권태는 맘만 먹으면 쉽게 벗어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된다. 어떤 정서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과소평가 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바로 이 정서들을 통해 세상을 알고, 또 스스로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권태는 이따금 지적으로 진부한 견해와 개념에 대해 불만족을 일으킨다.  따라서 창조성을 북돋을 수 있다. 사상가와 예술가들이 지금까지 널리 인정되어온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변화를 모색할 수 있다. 권태가 극복하기 매우 어렵고 무작정 계속된다면 그건 문제다.  권태는 나름 견딜만하다.  그러나 만성적 권태는 심지어 아주 창조적인 사람에게도 기운을 앗아가고, 동요, 화, 우울증으로 번질 수 있다. 하지만 시인 브로드스키는 권태의 또다른 긍정적 측면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의 요지는 권태를 발판으로 진정한 자기자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권태에 빠지면 자기 자신과 세상 사이에 벽을 세움으로써 결국 스스로에게로 돌아간다는 얘기다.  권태에 빠지면 우리는 이따금 타인에게서,  세상에게서, 우리 자신에게서 멀어져 간다. 권태는 자아인식을 강화시킨다권태는 스스로 또다른 존재로 바라수 있는 기회다. 우울증은 단순한 권태와 실존적 권태를 한데 뒤섞어버린 주범이다. 이는 우울증이 두가지 양상으로 나뉘기 때문이다.  하나는 단순한 권태가 해소되지 않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우울, 권태, 조증 사이의 사이클을 이루는 하나의 극단적인 상태고, 나머지 하나는 실존적 권태라고 하는 잡다한 상태를 이루는 한 가지 구성 요소다.  다음에 설명된 사람은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우울증일까?  아니면 실존적 권태일까?

 

‘ 그는 운명을 빼앗긴 한 생명체로서 고독과 이루 말할 수 없는 불행을 느낀다. 그는 신에게도 회의적 이고 무기력에 굴복하여 모든 위안으로부터 차단된 채 하루하루를 겨우 연명하고 있다.  그는 모든 것이  비위에 거슬리고 식상하다. 친구도, 음악도, 여행도, 자신의 좋은 직업마저도 어딜봐도 어둠과 고난 뿐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주변 사람들은 그리 선하지도 이타적이지도 않다.  그는 실망하고 뒤이어 환멸을 느낀다. 그에게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는 스스로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더 이상 지탱할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 이유없이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 안에서 뭔가가 산산조각 났다고 생각한다. ’  

 

이 사람은 정신의학의 창시자 에밀 크레펠린이 1921년에 우울증 환자를 묘사한 글이다.  실존적 권태와 우울증은 혼돈하기 쉽다. 실존적 권태는 정서도, 기분도, 느낌도 아니다. 그보다는 꽤 그럴듯해보이는 학구적인 명칭에 가깝다. 권태라는 감정을 어린애같은 투정으로 치부하거나, 게으름이나 안일한 태도의 증상으로 여길 필요는 없다.  더욱이 권태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여 이를 확대 해석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권태란 인간이 겪는 정상적이며 유익하고 아주 흔한 경험중 하나다. 권태는 그저 하나의 권태로운 경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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