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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 그 창조적인 역사 (피터 투이

권태란? (1)

우리는 언제 권태를 느낄까?   바로 앞을 짐작할 수 있고 단조로우며, 벗어나기 힘든 상황에서 권태를느낀다. 또 상황이 너무 오랫동안 제자리에 머물러 있어도 권태를 느끼기 쉽다.  권태는 특히 숨 막힐 듯 갑갑한 분위기의 집안에서 그 싹을 틔운다.  고인 물처럼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상태와 지긋지긋한 무료함이 이런 종류의 권태를 만들어 낸다. 성인들은 권태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다그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로 양쪽으로 펼쳐지는 사막은 가도 가도 같은 풍경을 선사한다.  이런 길을 운전하면 사고를 내는 일도 부지기수다. 이런 성격의 권태를 상황적 권태라고 한다. 또 다른 성격의 권태는 과도함과 반복의 원인 이다. 포만감이 극에 달하고, 싫증나고 물려버릴때까지 계속되는 이 경험은 라르스 스벤젠이 말하는 과잉에 의한 권태다. 이 권태는 속박된다는 느낌이 덜하기 때문에 상황적 권태와는 다르다. 권태는 과일과 관련이 있다.  쉽게 말해서 뭔가를 너무 많이 먹거나 마시면, 메스껍고 구역질이 난다. 그렇게 되면 진절머리 나도록 싫증이 날 때 느끼는 혐오감에 이른다. 사람들이 자주 쓰는 '완전히 신물이 나버려'라는 표현을 한번 보자.  이 말을 하는 사람은 구역질이 나거나 혐오감이 느껴질 만큼 과잉의 상태에 다다른 것이다.  내 경험으로 볼 때 사람들은 신체적인 포만감을 느낄 때처럼 심한 권태감을 느낄 때 이 표현을 사용한다.

 

심리학자 로버트 플루칙은 권태와 혐오감의 연관성을 뒷받침하는 과학적인 근거를 내놓았다. 그는 각종 정서가 생명체가 생존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줌으로써 적응적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동물과 인간은 혐오감을 느끼기 때문에 해로운 물질을 멀리할 수 있다.  모든 동물이 질병을 옮기는 요인을 피하거나 두려워하고, 혐오감은 질병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일종의 회피반응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므로 혐오감은 위험물질에 대한 진화적 반응인 셈이다. 혐오감이 전염병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다면 권태는 전염병 같은 사회적 상황, 즉 온전한 정신으로 버티기에는 너무 갑갑하고 무료한 상황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다.  이 모든 게 사실이라면  권태는 혐오감과 마찬가지로 건강에 이로운 감정이다. 이 책에서는 상황적 권태와 과잉의 권태를 한데 묶어 단순한 권태라 부르기로 한다. 권태를 시각적으로 나타내는 데에는 몇가지 법칙이 있다.  물론 딱 정해진 법칙은 아니다.  어쨌든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무한함, 구체적으로 말하면 끝없이 펼쳐지는 풍경이다. 이 하염없이 되풀이 되는 풍경이 예술적품 속에서 권태감을 불러일으킨다. 무한함은 공간적 측면뿐만 아니라, 시간적 측면도 있다. 시간은 권태와 매우 흥미로운 관계에 있다누구나 지루해지면 시간이 더디게 가는 걸 경험한다. 술병과 담배는 노인을 치료해 주는 약이다. 예나 지금이나  약물과 그에 따른 위안과 취기가 섞인 망각은 지독한 권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취기'에 의한 망각과 '여행'과 '섹스'라는 이 세 가지 치료약은 단순한 권태든 실존적 권태든 모든 권태를 해결하는 가장 흔하고 상투적인 수단이다.

 

망각은 기억을 서서히 흐리게 하다가 종국에는 자신에 대한 인식마저도 비워버린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이야기했던 일들을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때는 이미 내가 아니다.  이국적인 것이든 성적인 것 이든 새로운 뭔가를 빠르게 경험하면 할수록 그만큼 빨리 권태로워진다.  새로운 것은 또 다른 무한함이 된다. 서서히 또 희미해져 간다. 권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때부터는 상황이 달라진다.  권태가 꾸준히 지속되고 정서적인 문제와 연관되면 심각한 결과가 생겨날 수 있다.  학교 수업이나 달리는 도로나 디너 파티가 지루한 것과는 별개 문제다. 이런 권태에는 끝이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나 인생의 동반자에게서 갑작스레 권태를 느끼는 건 그와는 다른 문제다. 이런 유형의 권태는 당혹스럽다. 이런 권태는 사람의 존재 자체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실존적 또는 정신적 권태라고 부른다.  션 데즈먼드 힐리는 그의 책 ‘권태, 자아, 문화’에서 실존적 권태를 극도의 권태라 칭하면서 개인적 의미에 대한 인식의 상실이 수반된다고 말했다.  이는 정신적인 측면에서 한 개인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 욕구를 앗아갈 수도 있고 삶이 헛되다고 느끼게 할 수도 있다.  또 삶의 가치에 대해 절망을 느끼고, 식음을 전폐하는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다. 이는 찰학적인 질병이다. 우울함은 가볍지만 지속적인 슬픔부터 격렬한 심리적 고통까지 모든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실존적 권태도 마찬가지다. 데이비드 론디의 더욱 포괄적인 견해 즉, 실존적 권태란 '좌절, 식상함, 우울, 혐오, 무관심, 무감각, 갇혀 있다'는 느낌 등의 서로 연관된 장애들을 두루 포함한 말이라는 견해가 가장 설득력 있다.

 

패트리샤 메이어 스펙스는 ‘권태의 문학적 역사’에서 실존적 권태가 어떻게 이해되고 현시대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설명했다. 권태의 허구적(시적)환기는 20세기 들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는데,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 모더니즘 때문이다.  모더니즘은 전통의 상실이나 위기로 대표되는 세속적이고 분열된 세상, 즉 권태의 전형적인 상황속에 고립된 개인을 위치시킨다.  권태는 의미있는 일을 찾지 못하고, 나태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의 문화적, 심리적 상태를 이해하는 데 편리한 평가기준이 된다.  좀 더 일반적이고 넓은 의미에서 20 세기초의 권태는 끈끈한 유대감이나 확고한 전통이 존재하지 않는 삶에 내재된 공허함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이 권태를 느끼므로 권태로 진정 고통받는 사람이 잘 구분되지 않는다.  권태는 삶의 방식이나 말투, 또는 이 둘 모두를 의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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