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힐링 에세이

도시을 걷는 사람들

 

낯선 도시의 거리를 걷는다. 아무런 선입견 없이 아무런 목적도 없이 걷는다.  그 도시의 빛이,  그 도시의

냄새가, 그 도시의 소리가, 여컨대 그 도시의 구체적인 삶이 자신의 몸 속에 깊숙이 스며들 때까지 걷는다.

 

길을 갈 때 그 길의 멀고 가까움이나 풍경은  보행자 자신의 정서적인 조건과 분위기에 따라 달라진다.

피곤함, 서두름, 마음의 한가함의 정도에 따라 길을 걷는 사람에게 순조로울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길의 객관성은 그때그때의 분위기라는 필터를 통해 걸러진다.

 

어떤 도시는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이나 여행자들의 발걸음을 통해 비로소 존재한다.  그들은

도시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사람과 사물을 만나고, 상점, 명소, 행정관서, 역, 공연장, 카페, 여가를

즐기는 장소 등과 침해짐으로써 그 도시를 창조하고, 그 도시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거리를 지나

다니는 행인들은 그 도시가 불러일으키는 활력, 혹은 졸음, 즐거움, 혹은 권태의 기호다.

 

시간의 흐름은 그 도시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의 특별한 순간들에 박자를 매겨준다. 새벽 거리의 다소

한산한 행인들은 아직 졸음기가 가시지 않았지만, 발걸음이 분주하다.  지각을 하지 않으려고 걸음을 제촉

하다보니 한가하게 이리저리 살피며 걸을 시간이 없다.  학생들과 직장인들이 합류하면, 거리는 활기가

되살아나고, 상점은 문을 연다. 자동차 통행이 많아진다. 이윽고 시간이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정오가

가까워지면 보행자들의 물결이 눈에 띄게 늘어나다가 차츰 썰물처럼 빠진다.

 

저녁이 되면 거리는 차츰 한산해지고,  오직 축제꾼들과 야행성 패거리들 혹은 친구들의 집이나 식당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려고 발걸음을 재촉하거나, 아직도 한동안 서성거리는 사람들만 남는다. 밤은 경계를

지우고, 사물들의 친숙한 의미를 해방시키고,  모험의 매력 혹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자극한다. 근처에 알 수 없는 위험이 감도는 것만 같다. 거리에 가득해지는 침묵, 드물어지는 자동차와

인적, 이런 것들은 마음속에 이상한 느낌을 자아내는 동기가 된다. 도시에서 걸어다니다 보면 여기저기에서

예기치 않은 구경거리를 만나게 되어 온갖 호기심이 발동한다. 자잘한 사건들이 수없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모든 걷기는 계절을 탄다.  철따라 달라지는 냄새, 광선, 나무, 꽃, 흐르는 물의 수위, 온도의 주기를

접하면서 보행자가 세계와 맺는 관계의 톤이 변한다.  그리하여 기상의 이변이나 되풀이 되는 눈, 살얼음,

우박, 비, 낙엽, 혹은 진창의 경험을 낳고, 그것은 전에 한번도 맛보지 못한 감각들을 일깨우거나, 아니면

같은 분위기 속에서 경험했던 다른 순간들의 내밀한 기억을 상기시킨다.

 

도시는 모든 것을 사람과 인공적 물건으로 덮어버렸다. 계절이 변하면서 달라지는 시장의 진열대나

그 변화마저 점점 더 식별하기 어려워진다. 도시의 전체적 분위기, 행인들의 의상, 어떤 냄새들, 나뭇잎,

어렴풋이 알아차릴 수 있는 몇 안되는 징후들이 그것이다. 실제로 도시는 계절과 아무 상관이 없다. 이십년

전만해도 이 도시,  저 도시를 뚜렷하게 구별지어 주던 특징들이 점차로 사라져 가는 것을 아쉬워

한다.  이제는 도처에 똑같은 상점들, 똑같은 영화관들, 어디나 똑같이 비좁은 공간을 가득 채우는 자동차

물결들뿐이다.

 

항구적인 소음이 가득한 도시생활에 길이든 도시인에게 어떤 침묵의 순간이 갖는 의미는 농촌 사람들의

느낌,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도시인은 침묵이 지배하는 공간에서는 마음이 편치 못하다. 그는 침묵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얼른 큰 소리로 말을 하거나, 자동차의 라디오나 시디음악을 켜서 안도감을 주는

소리를 추가하고, 누구에게 건 휴대전화를 걸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 받고자 한다.

 

소음에 길이 든 사람들에게 고요한 침묵의 세계는 결국 표적이 사라진 불안의 세계가 되고만다.

갑자기 떠들썩한 소리가 딱 그쳐 버리면, 기분이 으스스해지기 쉽다. 그것은 곧 엄청난 재난이 발생하기

직전의 정지의 순간처럼 느껴져서 길갓집에 사는 사람들은 공연히 겁을 내며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

보는 것이다.

 

걷는다는 것은 더위와 추위를, 바람과 비를 만난다는 것이다. 도시는 하루의 시간대나 계절에 따라

그리고 햇빛이나 소나기로 인하여 피로해지고, 뜨거워지고,  때로는 더욱 생기를 얻는 개인의 육체적

상태에 따라 피부에 변화무쌍한 촉감을 느끼게 한다.  비의 경험은 몸이 겪는 경험이다. 물방울들이

얼굴을 후려치면서 머리와 신발을 적신다. 그 물방울 들은 깜짝 놀란 행인을 떨게하기도 하고, 서늘한

기분을 만끽하게도 하고, 때로는 온몸을 얼어붙게도 한다.

 

비는 도시 풍경을 휘젓고,  그 색깔을 바꾸고, 공간을 어둡게 한다비는 관례적인 형식을 깨고,

더러는 의외의 만남을 만들기도 한다. 비가 오면 사람들은 공동의 적에 대항하여 하나가 된다. 시민

들은 대담하게 모르는 사람끼리도 서로 말을 건네고, 이야기를 나눈다. 대홍수가 나면 인간은 극단적인

상황에 대처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서로 화해하고 하나가 된다. (다비드 르 브르통, 김화영 옮김)

 

'힐링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걷기의 정신  (0) 2018.04.30
마음열기  (0) 2018.04.25
침묵  (0) 2018.04.23
걷는즐거움(2)  (0) 2018.04.18
걷는 즐거움(1)  (0) 2018.0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