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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에세이

걷는 즐거움(1)

 

걷는다는 것은 세상를 온전하게 경험하는 것이다. 이때 주도권은 인간에게 있다. 기차나 자동차는 길만

가르쳐 주지만, 목적 없이 그냥 걷는다는 것은 지나가는 시간을 음미하고, 전에 알지 못했던 많은 장소

들과 얼굴을 발견하고, 몸을 통하여 감각과 관능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확대하기 위해서 걷는다.

 

진정한 걷기 애호가는 구경거리를 찾아서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기분을 찾아서 여행한다.

다시 말해 아침의 첫걸음을 동반하는 희망과 저녁의 휴식에서 맛보는 평화와 정신적인 충만감을

찾아서 여행한다. 루소에게 있어서 걷기는 고독한 것이며 자유의 경험, 관찰과 몽상의 무궁무진한 원천,

뜻하지 않는 만남과 예기치 않는 놀라움이 가득한 길을 행복하게 즐기는 행위이다.

 

나는 걸으면서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 이렇게 뿌듯하고 존재감을 느끼며 살아본 적이

없다. 혼자 걸으면서 했던 생각들과 존재들 속에서만큼 나 자신이었던 적은 없었다.

 

비록 간단한 산책이라 하더라도, 걷기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성급하고 초조한 생활을 헝클어 놓은

온갖 근심, 걱정들을 잠시 멈추게 해준다. 두 발로 걷다보면 자신에 대한 감각, 사물의 떨림이 되살아

나고, 쳇바퀴를 도는듯한 사회생활에 가리고, 지워져 있던 가치의 척도가 회복된다.

 

기상학적, 지리적, 사회적 재난 때문에 길을 떠날 수가 없어서 걷고 싶은 사람의 발을 묶어놓을 수도 있다.

눈앞에 펼쳐놓은 지도나 흥미진진한 이야기들과는 딴판으로 욕망을 설레게 하는 상상의 선들 저 너머에,

한걸음 한걸음 밟아가야 할 현실의 길이 가로 누워, 여행자의 육체적, 정신적 의지와 정황에 그것 특유의

까다로운 제약을 가한다.

 

평소의 모든 활동과 일상적인 임무, 체면상 필요한 일이나 남들에게 신경 쓰는 일 따위는 물론 하던 일마저

손에 놓아버리고, 걸어서 떠나는 사람은 익명속으로 미끌어져 들어가는 것을 즐기고, 함께 길을 가는

동행이나 길에서 만난 사람 이외에는 더 이상 그 어느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 입장이 된 것을

즐긴다. 이렇게 가기 위해 발을 내딛는 것은 길건 짧건 어느 한 동안에 있어서 존재의 변화를 의미한다.

 

길가에서 등에 진 배낭을 벗어놓고 달콤한 낮잠을 즐기거나, 돌연 마음을 흔들어 놓는 한 그루 나무나 어떤

풍경을 음미하거나, 또는 운 좋게 목격하게 된 어떤 지역의 풍습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선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단조롭기만 한 풍경, 더위,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근심, 걱정 때문에 걷는 것이 지루한, 시간을 따라 늘어

나는 권태의 발소리로만 느껴지는 때도 더러 있다. 어서 다음 기착지에 다다랐으면 하는, 그만 집으로 돌아

갔으면 하는 조바심도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빈손인 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해지고, 남아도는

시간이 너무 많아 뭔가 해야 할 일을 안 하고 있다는 막연한 불안이 찾아든다.

 

걷는 사람은 시간의 부자다.  그에게는 한가로이 어떤 마을을 찾아가 구경하고, 호수를 한 바퀴 돌고,

강을 따라 걷고, 야산을 오르고, 숲을 통과하고, 떡갈나무 아래서 낮잠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있는 것이다.

그는 자기 시간의 하나뿐인 주인이다. 걸어서 길을 가다보면 시간의 길이에 대한 일체의 감각이 사라져

버린다. 걸어서 가는 사람은 몸과 욕망의 척도에 맞추어 느릿느릿 해진 시간 속에 잠겨있다.  혹시

서두르는 경우가 있다면, 오직 기울어 가는 해보다 더 빨리 가야겠다는 서두름 정도이겠다. ...

걷기예찬 (다비드 르 브르통, 김화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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