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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에세이

마음열기

 

자동차의 발명은 어떤 면에서 유감스러운 것이다.  만약 인간에게 두 다리 이외 다른 이동수단이 없었더라면

살아가는 동안 그렇게 멀리가지 않았을 것이다.  보행자가 연약하다는 사실 때문에 인간의 훨씬 더 신중

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며,  다른 사람을 정복하고 멸시하기보다는 자신을 열어보이려고

애썼을 것이다. 한가지 확실한 사실은 발로 걷는 사람은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 혹은 기차나 비행기를

이용하는 사람처럼 거만하게 구는 일이 적을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보행자는 언제나 인간의 높이에 서서 걸음으로써 한걸음 한걸음을 떼어 놓을 때마다 세상이

거칠다는 것을 느끼고, 길에서 지나치게 되는 행인들과 우정어린 타협을 이룰 필요를 절감하기 때문

이다. 걷는 경험은 인간의 한계를 인식하게 만든다. 그 한계는 인간에게 자신의 연약함과 동시에 그가

지닌 힘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보행은 가없이 넓은 도서관이다.  매번 길 위에 놓인 평범한 사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도서관, 우리가

스쳐 지나가는 장소들의 기억을 매개하는 도서관인 동시에  표지판, 폐허, 기념물 등이 주는 집단적 기억을

간직하는 도서관이다.  이렇게 불 때 걷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 풍경들과 말들 속을 통과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어떤 교육학적 이념의 견지에서 걷기의 덕목을 개인의 인격형성 과정 속에 포함시켜 생각해 왔다.

인간을 성숙하게 만들고, 또 그의 몸 그 자체를 통해 이 세상의 온갖 감각을 익히도록 함으로써 여러

지역의 다양성과 복합성에 눈 뜨도록 하는데 있다.

 

길가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수수께끼 같은 수많은 장소들 속에서 어디가 어디인지를 분간하는 일,  지도나

풍경들의 색깔과 선들 속에서 자신이 서 있는 현재의 위치를 헤아리는 일이고,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앞으로

가야 할 길을 눈대중의 척도에 따라 계산해서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노력을 들여야 할지를 예측하는 일이다.

 

한밤중에 달빛을 받으며 숲속이나 들판을 걷게 되면, 그때의 기억은 마음속에 남아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다.

별빛 속이나 캄캄한 어둠 속에 서면 인간은 무한하고,  진동하는 어떤 우주 속에 던져진 피조물로

되돌아간 자신의 존재를 느낀다.

 

도시의 밤에는 심리적인 번뜩임이 없다. 거기에는 형이상학적 차원이 결여되어 있다.  끊임없는 자동차

소리가 모든 신비감을 쫓아버리고, 언제나 길게 늘어선 건물들이 지평선을 막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은은하게

비치는 불빛이 공포감을 없애준다. 아이들에게 밤의 고요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비는 사람의 몸만 부대끼게 하는 것이 아니다.  쏟아지는 비에 강물이 불어나고, 길은 진창으로 변한다.  비가

오면 보행이 어려워지는 것은 사실이나 비가 반드시 해로운 것만은 아니다. 장비를 잘 갖춘 여행자에게 비는

황홀한 것일 수 있다.  비는 풍경에 푸릇푸릇한 생기를 준다.  그리하여 사람은 마음이 고즈넉해져서

위안을 얻는다. 풍경 위로 덮치는 우박이나 안개나 구름, 혹은 눈보라는 비록 그 당장에는 극복해야 할

고난이겠지만, 겪고 난 다음에는 흔히 지울 수 없는 추억이 된다.

 

오솔길은 물론이지만 세상의 모든 길은 땅바닥에 새겨진 기억이며, 오랜 세월을 두고 그 장소를 드나들었던

무수한 보행자들이 땅위에 남긴 잎맥 같은 것, 여러 세대의 인간들이 풍경 속에 찍어놓은 자취 같은 것이다.

자동차를 몰고 가는 사람은 가능한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하여 자신에게나 남들에게나 다 같이

치명적이 될지도 모르는 싸움에 열중한다. 그러나 걷는 사람은 그렇게 바삐 서두르는 법이 없다.

 

여행은 어떤 것이나 다 담화요 이야기다. 그 중 하나는 여행중 끊임없이 상상 속에서 떠올리는 담화 혹은

이야기이며, 다른 하나는 여행이 끝난 다음 나중에 자나다가 마주친 사람들, 집에 돌아와 만난 친구들, 혹은

아직 가고 있는 길 위에서 만난 친구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글쓰기는 길을 가는 동안 수집한 수많은 사건

들의 기억, 숱한 감동들, 그리고 느낀 인상들이다.

 

길에 걸어다니는 사람이 사라지고 자동차만 씽씽 달리게 된지는 오래되지 않았다. 우리 조상은 장소를 이동

하는데 걷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에 걷는다는 것은 하나의 선택이다. 원칙적으로 길에는

걷는 사람들이 없고, 오직 자동차만 지배하는 공간이 되었다.

 

자동차를 숭상하는 문화가 도처에 만연하여 걷는 사람들이나, 자전거 타는 사람들에게 필연적으로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세계를 만들어 낸다. 관광산업은 희귀하고 소중한 여러 장소들을 소비에 내맡긴다. 그러나

그 결과 그 장소들은 파괴된 진부한 공간으로 변해버렸다.

 

고독, 침묵, 아름다움을 보증해주는 여러 시간동안의 도보여행 끝에야 겨우 접근 할 수 있었던 수많은

비경들... 그 비경들은 이제부터 거침없이 그곳에 이를 수 있도록 해주는 도로들 덕분에 자동차를 타고

찾아드는 군중들에게 넘어가면서 영원히 추방해 버렸다.

걷기예찬 (다비드 르 브르통, 김화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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