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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에세이

침묵

어깨에는 항상 무거운 짐이 짓누른다.  심지어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경험상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다 버리는데도 그렇다. 짐을 너무 무겁게 꾸리지 않도록 신중을 기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지나치게

인색한 짐을 꾸렸다가는 어느 순간에 가서 꼭 필요한 것이 수중에 없어 곤경에 빠질 위험이 있다.

 

떠날 때 친구들과 길을 함께 떠나지만 돌아올 때는 원수들과 함께 돌아온다어떤 사람과 열흘 동안

함께 걷는다는 것은 그와 십년동안 함께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같이가는 사람이 뒤쳐져서 못 따라

오는 것도 참지 못한다. 그들을 위해서도 할 수 없는 일이고, 나를 위해서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여러시간 동안 걷고 난 다음 허락되는 낮잠이나 밤잠은 가히 축복이라 할 만하다.   피곤이 사지를 누르면서

몸을 편안하게 내맡길 것을 권한다. 나는 들판 한가운데 누워서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세상의 포근한 공허와 내가 누워있는 한 뼘 풀밭의 감미로움이 내 가슴을 짓누르는 것이다. 한밤중

이슬비에 잠을 깼다. 하늘은 캄캄하고 별은 사라지고 짐승소리만 들린다. 어느 산 허리에서 여명을 맞으며,

잠이 깨어 그 어떤 로도 표현 할 수 없는 한 세계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걷는다는 것은 침묵을 횡단하는 것이며, 주위에서 올라오는 소리들을 음미하고 즐기는 것이다.  여러

가지 소리들이 침묵의 한가운데로 흐르지만, 그 침묵의 배열과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는다. 오히려 그 소리들이

침묵의 존재를 드러내주고 어떤 장소의 청각적 질감에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침묵은 감각의 한 양식

이며, 개인을 사로잡는 어떤 감정이다. 돌들 사이로 길을 내며 흐르는 샘물소리, 한밤의 어둠을 가르는 올빼미

울음소리, 연못의 수면 위로 잉어가 펄쩍 뛰어오르는 소리, 발밑에 뽀드득 뽀드득 눈 밟히는 소리, 햇빛을 받아

솔방울 터지는 소리는 침묵에 밀도를 부여한다.

 

도회지 시람들의 소란스러운 삶과 반대로 침묵은  소리의 부재로 발전된 기술문명이 아직 남겨놓은 지평으로

현대가 흡수하지 않은 미개간지의 땅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혹은 그 반대로 현대인이 고요의 보호 지구로서

일부러 책정해 놓은 특수지역이라고 간주되기도 한다. 세상은 오늘의 사회들이 개발한 기술적 도구들로 쉬지

않고 메아리친다. 

 

개인과 집단의 삶은 그 도구를 사용하면서 영위되는 것이다.  현대의 도래는 소음의 등장을 뜻한다. 

어디선가 항상 휴대전화기가 울려댄다. 우리사회가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침묵은 기계의 고장, 기능

저하, 정전으로 인한 잠정적인 침묵이다.

 

계곡의 침묵에 귀를 기울인다. 그 절대적 고요를 흔들어줄 바람한 점 없고, 움직이는 짐승하나,  지저귀는 새

마리 없고, 오랫동안 따라왔던 시냇물의 규칙적이고 시원한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다.  침묵은 기술 이전의

어떤 경험 모터도, 자동차도, 비행기도 없는 어떤 세계, 즉 다른 시간의 고고학적 유적을 가리켜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되돌아가는 발걸음은 느리고 어렵고 씁쓸하다.  내적을 평화를 경험하고 나서 다시 소음으로

가는 길이니까.

 

환경은 단순히 인간이 눈으로 보는 것뿐만 아니라, 귀로 듣는 것으로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침묵이

지배하는 어떤 분위기는 세계속에 아주 특별한 하나의 차원을 열어 놓는다. 여러 달 동안 절대적인

침묵 속에 빠져 지내고 나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골짜기를 향해 걸어가면서 시간을 채근하기

보다는 그 시간에 맡기고 실려가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침묵은 개인이 귀로 듣는 것의 해석 방식이며, 또한 세계와의 재접촉을 위하여 자아로 되돌아오는 길

이다.  그러나 때로는 상투성이나 도회의 소란을 멀리하여 스스로 그 침묵을 추구하려는 노력, 그 침묵을

찾아 내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어떤 풍경의 아름다움과 관련된 침묵은 자아애로 인도하는 길이다. 문득

시간이 정지하는 그 순간에 하나의 통로가 열리면서 인간에게 자신의 자리를 되찾고,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진다... 걷기예찬 (다비드 르 브르통, 김화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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