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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에세이

걷는즐거움(2)

 

보행은 다른 활동들 이상으로 숨, 피로, 의지를 걸고 하는 일이다. 입술이 닿을 만한 곳에 샘 하나 없고,

뜨내기 노동자에게 진종일 쌓인 고단함을 풀어줄 주막집 하나, 농가하나 보이지 않을 때의 배고픔과 목마름,

험난한 길, 결국 어느 곳에 도착하게 될지 알 수 없는 불안을 견디어낼 용기를 걸고 하는 일이다. 

 

길바닥의 돌이나 흙을 만지고, 두 손으로 나무 껍질을 어루만지고, 시냇물 속에 손을 담근다. 냄새가 몸속에

파고든다.  젖은 땅 냄새, 보리수 잎사귀, 송진 냄새, 꽃향기, 어둠에 싸인 숲의 미묘한 두께를, 땅이나 나무

들이 발산하는 미묘한 신비의 힘을 느낀다. 그는 별을 보고 밤의 질감을 안다.  새들이 우짖는 소리, 숲이

떨리는 소리, 폭풍이 밀려오는 소리나 마을에서 아이들이 부르는 소리, 시끄럽게 울어대는 매미 소리나 햇빛

속으로 솔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해질녘의 행복, 비를 맞아 옷이 젖고, 양식이 젖고, 오솔길이 질척거린다.  더위 때문에 속옷이 살갗에 달라

붙고, 눈 위로 땀이 흘러내린다. 보행은 그 어떤 감각도 소홀히 하지 않는 모든 감각의 경험이다. 여러

시간 고단하게 애쓴 다음 잠시 쉬는 순간만큼 음식이 달고 맛있을 수 없다.  그 음식이 비록 보잘 것 없고,

소량일지라도 보행은 삶의 평범한 순간들의 가치를 바꿔놓는다.  황금빛 밀밭이 반짝이는 모습, 뜨거운

햇빛에 시달리고 난 다음 목을 축여주는 냉수의 그 비길 데 없는 맛. 감미로운 무기력이 전신의 뼈끝마다

처럼 퍼져갔다.

 

한 끼의 검소한 식사가 때로는 최고의 만찬보다 더 나은 것이니, 그 포만감과 유쾌함은 지워지지 않는 기억

으로 남는다. 극도의 목마름을 통해 비로소 잎사귀 밑에 가려 있던 딸기의 맛을 알고, 그 서늘한 그늘을 안다.

더할 수 없는 피로와 졸음에 이르러서야, 모든 것이 마음속에 힘없이 주저앉아 잠 속으로 빠져들 뿐

일 때, 비로소 그대는 한밤중의 하늘로 빠르게 솟아올라 가볍게 걸린 달을 볼 줄 안다.

 

초라한 침상이 아늑하게 느껴질 정도로 피곤을 맛보고, 시장기가 별 볼일 없는 자연의 음식에 달콤한 양념이

되어 줄 정도로 배를 곯아 보는 것은 나쁘지 않다. 걷기는 사람들의 본래의 의미와 가치를 새로이 일깨워

주는 인식의 한 방식이며, 세상만사의 제 맛을 되찾아 즐기기 위한 보람있는 우회적 수단이다.

 

걷기는 세계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방법론이며, 스스로 거쳐온 자연을 자기속으로 흡수하고, 일상적인

인식 및 자각방식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세계와 접촉하는 수단이다.  차츰차츰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보행자는 세계에 대한 그의 시야를 확대하고, 자신의 몸을 새로운 조건속으로 밀어 넣는다.

걷기예찬 (다비드 르 브르통, 김화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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