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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본성에 대하여 (에드워드 윌슨,이한음

인간의 공격성

인간의 공격성은 타고난 것일까? 지난 3세기 동안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대략 그 기간의 절반을 전쟁으로 보냈다. 인간은 공격 행동이라는 유전적 성향을 갖고 있다. 오늘 가장 평화를 애호하는 부족은 어제의 파괴자였기 일쑤고, 미래에 다시 군대와 살인자를 배출할 것이다. 현대 아프리카 쿵족의 어른 세계에서는 폭력을 거의 찾아 불 수 없다. 엘리자베스 마살 토마스는 그들을 무해한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50년 전 이 부시맨의 인구밀도가 지금보다 더 높고, 이들이 중앙정부의 통제를 느슨하게 받고 있던 시기에 그들의 1인당 살인율은 디트로이트나 휴스톤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원시인들은 자신의 세계를 동료와 적으로 나눈 뒤, 그 임의의 경계선 밖의 온건한 위협에도 즉시 깊은 감정으로 대응을 했다. 전쟁은 일부 신생사회의 정책수단이 되었으며, 전쟁을 가장 잘 수행한 사회는 가장 성공한 사회가 되었다. 호전적인 민족들 속에서 문명이 발생한데 반해, 평화를 누렸던 채집자와 수렵자들은 땅끝으로 추방되었고, 그곳에서 그들은 한때 전쟁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자신을 멸망시키고 위대해졌다가, 이제는 스스로의 도구에 희생당하고 있는 국가들을 지켜보면서 얻는, 모호한 만족감만을 간직한 채 서서히 절멸되거나 흡수되어 갔다.

 

사회가 중앙집권적이 되고 복잡해질수록 더 정교한 군대조직과 전투기술이 발달하게 되고, 군사적으로 더욱 도화 할수록 그 사회는 영토를 확장하고 경쟁관계에 있는 문화들을 제거해 나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문명은 문화적 진화와 조직화한 폭력의 상호협조적 추진력을 통해 발달해 왔고, 우리 시대의 문명은 핵으로 인한 전멸 일보 직전까지 도달해 있다. 그러나 대만해협, 쿠바, 중동에서 보았듯이 국가가 벼랑 끝에 도달할 때마다 지도자들은 뒤돌아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왔다. 1967년 중동전쟁이 일어났을 때, 아바 에반은 “인간은 최후의 수단으로 이성을 사용한다”라는 잊혀지지 않는 말을 남겼다.

 

인간의 공격성은 야수 본능으로 설명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잔인한 환경에서 양육된 병리학적 증상도 아니다. 인간은 외부의 위협에 비합리적인 증오심으로 반응하고, 꽤 넓은 여분의 범위까지 고려하여 그 위협의 근원을 압도할 수 있을만큼 적개심을 고조시키는 성향이 강하다. 새들이 텃세 노래를 학습하고, 극지방 별자리를 보며 날아가는 성향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에서 우리는 사람들을 동료와 이방인으로 구분하는 성향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방인들의 행동에 매우 두려움을 느끼고, 공격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려는 성향이 있다. 이런 학습 규칙들은 지난 수십만 년에 걸친 인간의 진화 과정에서 진화해온 것일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그런 규칙들은 최대한 성실하게 지키는 사람에게 생물학적 이익이 제공되기 쉽다.

 

폭력적 공격성의 학습규칙들은 대부분 쓸모 없는 것들이다. 우리는 창, 화살, 돌도끼로 분쟁을 해결하는 수렵채집인이 아니다. 그러나 그 규칙들이 퇴색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해서, 그것들이 추방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것들의 주변에서 힘들게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그것들이 잠재된 채 잠들어 있고, 소환되지 않도록 하려면, 우리는 폭력을 학습하려고 하는 인간의 뿌리 깊은 성향을 줄이고 제어할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힘들고 거의 가본적이 없는 심리학적 발달의 길을 의식적으로 헤쳐나가야만 한다.

야노마뫼족은  말해왔다. “우리는 싸움에 신물이 난다. 우리는 더 이상 죽이고 싶지 않다. 그러나 다른 자들이 배신하기 때문에 믿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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