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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에세이

우리가 살만한 곳은 어디인가?

 

처음 이곳에 들어올 때 사람 없는 곳에서 두 철만 지내려던 것이 어느새 훌쩍 열두 해가 지났다.

돌아보면 한 생애도 이렇듯 꿈결처럼 시냇물처럼 덧없이 흘러가리라. 지난 한해 동안은 내 마음이

들떠서 한곳에 정착하지 못했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새로운 삶을 시도했다. 그러다가 올 봄에

생각을 돌이켜 다시 이 오두막에 마음을 붙이기 시작했다.

 

누가 보면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저러나 싶겠지만, 일단 내가 몸담아 사는 주거공간은 내 삶의

터전이므로 내 식대로 고쳐야 한다. 오늘 살다가 내일 떠나는 일이 있더라도 오늘 내 마음이

내켜서 하는 일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내 가풍이기도 하다.  그리고 수행자가 살다가 간

빈자리를 누가 와서 살더라도 덜 불편하도록 하는 것이 또한 내 도리이고 지론이다.

 

조선 영조 때 실학자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라는 책이 있는 데 우리나라 전역에 결쳐 지형, 풍토,

풍속, 교통, 각 지방의 고사, 인물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그는 사람이 살만한 조건

으로 네가지를 꼽고 있는 데, 자연과 인문사회적 조건과 함께 그 고장의 인심을 들고 있다.

 

사람이 살만한 터를 잡는 데는 첫째 땅과 산과 강 등 지리가 좋아야 하고, 둘째 땅에서

생산되는 것이 좋아야 하며, 셋째 인심이 좋아야 하고, 넷째 아름다운 산과 물이 있어야

한다. 이 네가지 중 하나라도 모자라면 살기 좋은 곳이 아니다..

 

꿈 같은 이야기다.  21세기 바야흐로 정보화 물결이 넘치고 있는 이 땅에서는 어느 고장을

가릴 없이 황량하고, 흉포해진 인심의 평준화를 이루고 있다.

 

법회를 마치고나면 내 속은 텅빈다. 되는 소리 안되는 소리를 쏟아놓고 나면, 발가벗은

몰골이 조금은 초라하게 느껴진다이런 때는 혼자서 나무 아래 앉아 있거나, 흐르는 개울가에

앉아 개울물 소리를 듣고 싶다. 굳이 표현하자면 나는 혼자 있고 싶다.

 

아무리 좋은 말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할지라도 나 자신이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그 어떤 좋은 말씀도 내게는 무연하고 무익하다.

 

말씀이란 그렇게 살기위한 하나의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의 삶에 이어지지 않으면, 말

이란 공허하다자기 체험이 없는 말에 메아리가 없듯이, 그 어떤 가르침도 일상적으로 생활화되지

않는다면 무익하다.

 

깨어 있고자 하는 사람은 바로 그 순간을 살 줄 알아야 한다좋은 친구란 주고 받는 말이

없어도 마음이 편하고, 투명하고, 느긋하고, 향기로운 사이다자신이 서 있는 바로 그곳

에서 자기 자신답게 살고 있다면, 그 자리에 좋은 말씀이 숨쉰다.

 

습관적인 만남은 진정한 만남이 아니다그것은 시장 바닥에서 스치고 지나감이나 마찬가지다.

좋은 만남은 향기로운 여운이 감돌아야 한다사람이 향기로운 여운을 지니려면,  주어진

시간을 값 없는 일에 낭비해서는 안된다. 탐구하는 노력을 기울여 쉬지 않고, 자신의 삶을

가꾸어야 한다. 흙에 씨앗을 뿌려 채소를 가꾸듯 자신의 삶을 조심조심 가꾸어 나가야 한다

그래야 만날 때마다 새로운 향기를 주고 받을 수 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또는 풍경이든, 바라보는 기쁨이 따라야 한다. 너무 가까이도 아니고,

너무 멀리도 아닌 알맞은 거리에서 바라보는 은은한 기쁨이 따라야 한다.

 ( 법정스님 '아름다운 마무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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