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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에세이

산중일기(최인호)-가정, 그리고 나

 

밖에서 존경 받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가족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은 드물다. 밖에서 인정받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내로부터 인정 받는 남편은 드물다서로 모르는 타인끼리 만나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과 더불어 온전한 인격 속에서 한 점의 거짓도 없이 서로의 약속을 신성하게 받아들이고, 손과 발이 닳을 때까지 노동으로 밥을 벌어먹으면서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면서 살다가, 마치 하나의 의복불에 타 사라지듯이 감사하는 생활 속에서 생을 마감할있는 가족이라면 그들은 이미 가족이 아니라, 하나의 성인인 것이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가정이야말로 하나의 엄격한 수도원인 셈이다.

 

언젠가 나이드신 부모님은 돌아가실 것이다. 가족 중에 누군가가 또 죽을 것이다. 자식들도 결혼을 하고 어느날 내가 손자를 봐야 할 할아버지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생긴다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  부처님 말씀이다이 말씀은 인간의 모든 일들이 연기緣起의 법에 따라 일어나고, 인간의 모든 일들은 인因과 연緣에 서로 의존하고, 관계를 맺고, 결과를 이룬다이 세상 모든 일들은 어느 것 하나 그대로 사라져 버리는 것은 없다. 나쁜 말 한마디도 그대로 사라져 버리는 일 없이 어디론가 날아가 어디엔가 씨앗으로 떨어져 나쁜 결과를 맺으며, 좋은 인연도 그대로 사라지는 법없이 어디엔가 씨앗으로 떨어져 좋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청계산을 오르면서 누군가와 함께 밥을 나눠먹을 친구가 한 사람쯤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아무리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라'는 부처의 말이 옳다해도 혼자서 점심을 먹는 일은 참으로 우울한 일이다. 그러다가 가끔 산행중에 우연히 친구를 만날 때가 있는데 그러면 또 자유를 속박당하는 것 같기도 하고참 모를 일이다.

 

부부는 20대에 서로 사랑으로 살고, 30대는 서로 정신없이 살고, 40대는 서로 미워하면 살고, 50대는 서로 불쌍해서 살고, 60대는 서로 감사하고 살고, 70대는 서로 등긁어 주며 산다이 유머가 사실이라면 우리 부부는 서로 불같이 사랑하고, 정신없이 살고, 미워하는 단계를 지나 이제 서로 불쌍하고, 측은해 살고 있다.어쩌면 인간은 자신말고 단 하나의 친구 조차 존재하지 않는 유아독존唯我獨尊의 괴로운 존재인지 모르겠다나는 누구인가?

 

우산 위를 두드리는 봄비가 이처럼 정다울 수가 없다우산을 타고 흐르는 빗물이 우산살마다 맺혀서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는다. 절뒤 숲속 아득한 먼 곳에서 새 울음소리가 은은히 들려온다봄비가 빗발이 굵어져 강물위에 수없이 동그라미를 그리고 바람은 강물 위로 미끄러지며 빗발을 이리저리 물고 다닌다.툇마루에 주저 앉아서 처마 끝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는 낙숫물을 바라보노라니 나는 정말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다. 이런 날이면  막연하게 누군가가 그립다.

 

매일 같이 함께 술을 마시고 함께 밥을 먹는 사람이라해서 반가운 벗은 아니다. 좋은 벗은 1년에 한번 만나지는 못하지만 만나면 늘 형제와 같다. 본디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무소유인無所有人들이 무엇이든 내게 무엇을 주려 한다. 그래서 만나면 마음이 통하고 연애감정보다 더 기쁘고, 정다운 우정을 느끼게 된다.

 

몇년 전까지 산속에 가거나 외딴 곳에 가면 심심해서 애국가가 나올 때까지 텔레비전을 보거나, 하다못해 고스톰 판을 벌이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였다사람들이 들끊고, 지하철이 달리고, 여인들의 화장품 냄새가 풍겨오는 화류향의 도시가 내체질에 맞는 곳이구나 하고 생각해 왔다.

 

본디 산에 사는 사람이라 산중 이야기를 즐겨 나눈다.5월에 부는 솔바람을 팔고 싶으나 그대들 값을 모를까 그게 두렵다.  (선종에서 내려오는 노래)

 

나는 내가 도시인이 아니라, 산에서 사는 사람 즉 산중인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