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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인문학 (전국국어교사모임, 황

생각 없음과 복종보다 더 큰 문제는?

유대인 대학살 주범 아이히만 재판을 목격한 한나 아렌트는 '집단학살을 자행한 이유가 무엇일까'라는 물음에 평범한 사람들도 순전한 생각없음( sheer thoughtlessness)의 상태에서 모든 것을 안일하게 수용하며,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지 않으면 누구나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고 답합니다. 이것이 ‘악의 평범성’입니다. 자기 생각없이 그저 조직에 충실하기만 했던 아이히만에게 히틀러가 독일 우파 시민을 학살하라고 명령내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유태인에게 하듯이 아무 꺼림낌 없이 명령을 수행했을까? 학살이있기 전에 반드시 특정 집단의 사람들을 자신과 구분하고, 그들을 배제하고 악마화 하는 ‘증오 언어’가 동원됩니다.

 

서양제국의 남미정복시대 백인들은 유색인을 ‘하느님을 믿지 않는 짐승이나 악마’로 매도했고, 히틀러는 유태인을 ‘절멸시켜야 할 빨갱이 반기독교도’로, 르완다의 후투족은 투치족을 ‘바퀴벌레’로, 관동대지진 때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우물에 독을 탄 폭도’로 매도하며,  그러한 증오 언어가 소문이나 미디어를 타고 번졌습니다. 나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동일성’이라고 봅니다. ‘생각없음’보다 ‘권위에 대한 복종’보다 더 근원적인 것은 ‘동일성에서 비롯된 타자에 배제와 폭력입니다. 기독교도인들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을 이단이나 악마로, 백인은 유색인을 야만적 짐승들로, 우파는 좌파를 빨갱이 불순분자로, 타자화 하여 폭력을 가하면서 동일성을 강화하고 그 안에서 안정을 누리며 집단의 유대를 강화하려는 속성을 갖습니다.

 

인류는 유전자 번식 본능뿐 아니라, 문명, 종족, 국가, 종교와 이데올로기 등의 요인으로 동일성을 만들고 강화해 왔습니다.  아이히만에게 진정으로 부족했던 것은 생각없음이 아닙니다. 타자인 유태인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고, 그들과 대화하지 않은 것이 문제입니다.  아무리 무지한 자라도 유태인 입장에서 잠시만이라도 고통을 체험했다면 그렇게 서슴없이 학살을 주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동일성이 형성되는 순간 세계는 동일성의 영토로 들어온 것과 그렇지 못한 것으로 나누어집니다. 동일성은 인종, 종교, 이데올로기, 입장이다르다는 이유로 분리해 타자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타자로 구분한 이들을 편견으로 바라보며 배제하고, 이에 폭력을 행사하며 동일성을 유지하거나 강화합니다. 반면에 동일성에 의해 타자화한 개인이나 집단은 삶의 활력을 잃고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자크 데리다, 들릐즈 등 많은 철학자들이 근대성 위기중 하나로 동일성에 대한 성찰을 이야기하며 타자와 공존을 추구하는 타자성의 사유를 대안으로 제시합니다. 원효는 ‘금강삼매경론’에서 “같다는 것은 다름에서 같음을 분별한 것이요, 다르다는 것은 같음에서 다름을 밝힌 것입니다. 같음에서 다름을 밝힌다하지만, 그것은 같음을 나누어 다름을 만드는 것이 아니요, 다름에서 같음을 분별한다하지만, 그것은 다름을 녹여 없애고 같음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로 말미암아 같음은 다름을 없애버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같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단지 다르다고만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것들이 같다고 말 할 수 있고,  같다고만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것들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불교 연기론에서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니 저것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우주 삼라만상 가운데 모든 것이 나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으며, 서로 조건과 원인으로 작용하면서 서로 의지합니다. 한 원인이 한 결과를 낳을 뿐 아니라, 그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됩니다. 모든 존재는 서로 의존하고 인과로 작용하며 서로를 만들어주는 상호의존성과 상호생성성의 관계의 다발 속에 있습니다. 인간 또한 존재인 동시에 상호생성자입니다. 모든 존재는 서로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됩니다. 원인이 결과될 뿐 아니라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됩니다. 타자의 의식, 말, 행동과 몸짓이 나에게 영향을 미쳐 형성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거의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그렇듯 찰나의 순간에도 타자는 내 안에 늘 들어오며 나를 형성하고 있으며, 그 역도 언제나 진행중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서로가 서로를 생성하게 하는 상호생성자입니다.

 

똑바로 상대방의 눈동자를 바라보면 상대방의 눈동자 안에 비춰진 내 모습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를 우리 말로 눈부처라 부릅니다. 눈부처는 상대방을 만나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가까이 가서 눈을 마주치며 하나가 되고자 할 때만 보입니다. 내 모습 속에 숨어있는 부처 곧 타자와 자연, 나보다 약한자들을 사랑하고 포용하고 희생하면서  그들과 공존하려는 마음이 상대방의 눈동자를 거울로 삼아 비추는 것입니다.  그 눈부처를 바라보는 순간 상대방과 나의 구분이 사라집니다. 내 안의 타자, 타자안의 내가 대화를 하여 공감을 매개로 하나로 어우러지는 것입니다. 이런 두사람이 서로 감성에 의해 차이를 인정하고, 몸으로 상대방을 수용하고 섞이면서 생성되기에 동일성으로 환원되지는 않습니다. 질 들뢰즈가 어떤 방식으로도 동일성으로 귀환하지 않는 차이 그 자체에 주목하여, 차이와 반복에서 이는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차이로 감성과 초월적 경험에 의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라고 말 한것과 통합니다.  차이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다른 것을 만났을 때 그것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킵니다.

 

소극적 자유는 모든 구속과 억압, 무명, 탐욕에서 벗어나 외부 장애나 제약을 받지 않은 채 생명으로서 생의 환희를 몸과 마음 가는 데로 누리며 자신의 목적을 구현하고, 인간으로서 실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적극적인 자유는 자기 앞의 세계를 올바로 인식하고 판단하고 해석하면서 모든 장애와 소외를 극복하고  세계를 자신의 의지와 목적대로 개조하면서, 진정한 자기를 실현하는 것을 뜻합니다. 대자적 자유는 자기 자신이 타자와 사회관계속에서 밀접하게 관련이 잇슴을 깨닫고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고, 연대하여 타자를 더 자유롭게 하여 내 자신이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고츠키 교육론과 저의 교육론을 결합하여 정의하면, 교육은 교육자가 피교육자에게 무엇을 가르치거나 전헤주는 것이 아니고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이 세계와 마주쳐 상호작용하면서 그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가운데 타자와 만나 서로 의지하고 생성하는 자임을 인식하여, 그의 고통과 공감하고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하고 협력하면서 인류가 온축한 지식과 지혜를 바탕으로 세계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응하고 타인과 부단한 상호작용속에서 서로 깨듣고 이를 끊임없이 향상 시키면서 완성에 이르고자 하는 적극적인 실천입니다. 교육은 내가 다가가서 그를 발달 완성시키고, 그를 통해 다시 나를 발달시키고 완성하는 부단한 상호작용의 행위입니다. 이러한 작업에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이 세계를 이해하고 여기서 올바른 의미를 창조하여 그를 좇아 자신을 성찰하고, 의미로 충만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