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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인문학 (전국국어교사모임, 황

공감하고 연대하는 시민을 어떻게 키워낼 수 있을까?

지금 우리 한국 사회는 어떤 모습인가요?  개발 독재와 신자유주의 체제의 모순, 권력층의 부패와 부조리, 잘못된 정치, 견제장치및 세력의 무력화 등으로 인해 이른바 헬조선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시민 또한 생존위기에 내몰리고 신자유주의의 탐욕을 내면화하면서 사회의 문제를 방관하고, 권력에 휘둘리는 소시민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시민사회가 붕괴한면서 국가- 자본- 종교권력층- 보수언론- 어용 지식인 및 전문가 집단으로 이루어진 카르텔은 거의 견제를 받지 않은 채 부패와 부조리를 일삼으며 권력을 남용하고, 폭력을 휘두르고 있습니다학교는 기업 연수원으로 전락한지 오래고 대다수 시민은 불평등에 더하여 부당한 착취와 억압, 인권 유린과 여러 자유의 제한속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표는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올바로 이해하고 존재의 의미를 성찰하고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협력하며 연대하는 시민들로 만드는 것이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를 움직이는 원리는 포섭과 배제입니다.  현대인은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교환 가치를 더 중시하면서 물화하여 물질과 돈을 신처럼 섬기고,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 채 심각한 소외를 겪고 있습니다. 모든 이들이 고독과 고립, 불안 속에서 삶을 연명하고 대다수가 과도하게 일을 합니다. 소수의 특권층이 모든 것을 독점하고 관료체제와 국가체제,  세계체제는 이를 더욱 강화하고 정당화 하는 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넘쳐나는 상품의 소비와 화폐 증식의 욕망, 향락을 매개로 악의 제국으로 포섭하고 그래도 유혹에 넘어거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철저히 배제합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악의 제국에서 돈을 섬기며 인간과 생명과 자연을 경시하고, 치열하게 경쟁하며 과도하게 일하면서 닭모이처럼 던져준 돈과 향락, 휴식에 만족합니다. 노예이면서도 주인으로 착각하며 사는 겁니다.

 

국가와 제국은 자본의 편에 서서 너무도 당연하게 폭력과 학살과 억압을 행하고 개인은 너무도 쉽게 자유와 인권, 생명을 유린당합니다.  빈자든 부자든 모두가 소외와 고독과 불안 속에 살기에 모두가 구조적 폭력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민들은 더욱 방관자로 1차원적 인간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교육이 내세우는 개인의 자율성 함양, 능력개발, 수월성이라는 것은 학생을 인격과 덕성과 교양을 갖춘 전인적인 인간으로 기르려는 것이 아니라, 개인 사이의 무한경쟁을 촉진하고 이를 합리화 하려는 이데올로기 장치일 뿐입니다지금 사회는 상위1%만이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나머지 모든 이들은 루저입니다.예전에는 가난한 학생이 상층으로 이동할 수 있는 통로가 교육이었습니다. 상위1%라는 목표는 그들 수준으로 양질의 사교육으로 감당할 수 있는 자본럭과 정보력이 있어야만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 생종경젱은 이미 승자와 패자가 정해진 게임입니다.

 

흙수저들은 근원적으로 모두 패자이고 패자로서 상처받고, 소외와 박탈감을 겪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에 오르지 못하면 개인의 능력과 재주가 모자라서 그렇게 되었다며 부조리한 체제를 합리화 합니다. 국가는 교육을 사기업에 떠넘기는 것을 정당화하고,  신자유주의 체제의 모순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면 사회 전체로서는 계급 적대의식을 무화하고, 사회통합을 이룹니다. 진정한 사회통합은 저항 주체로 나서는 시민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근대’에서 우리는 유동하는 액체 덩어리처럼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모한 모험을 체계적으로 재생산하여 모든 생명의 자기 파멸의 위협을 가져와 직접 감지되지 않고, 예측하기 어려워 불안감으로 충만한 위험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인류역사를 보면 새로운 에너지 체제와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매개체를 창출했을때 대변혁이 발생했습니다. 저는 디지털 사회에 부합하는 시민이 갖추어야 할 세 핵심요소가 존재의 의미에 대한 성찰,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 타자와 협력과 연대라 생각합니다.

 

인류 역사가 600만년에 이르지만 인간문명을 발전시킨 것은 1만년이 고작 넘을 뿐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1만여년만에 인류세를 만드는 등 신의 경지에 다다르게 되었을까요?  저는 의미의 생산과 공유, 전달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문화유전자 특히 의미는 아주 짧은 순간에도 공유 학습, 전달, 기억에 의해 진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한 종류의 사물을 다른 사물이나 몸을 통해 이해하고 경험하며 사고를 형성했습니다. 인류는 그가 서 있는 몸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인식하고, 보름달에서 그처럼 동그란 엄마 얼굴을 떠올렸습니다. 유사성의 유추인 은유를 통해 몸을 바탕으로 신체를 확장하여 자기 앞의 세계를 인지햇습니다.  본다는 것은 알거나 이해하는 것입니다. 남의 말을 청각을 통해 듣고 받아들이기에 듣는 것은 복종이나 깨달음을 뜻합니다.

 

인간의 몸이 자연과 상호적용하면서 몸을 통해 활동하고 이 신체적 경험을 반복하면서 영상도식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영상도식을 은유의 매개를 통해 구상적인 것이나 추상적인 것에 투사하여 추상적인 것을 이해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이를 더욱 체계화 하여 심오한 사고를 형성하였습니다. 인간은 자연과 접촉하고 대응하면서 자연적 지능, 과학기술적 지능, 사회적 지능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이것을 종합하여 세계를 이해하고 의미를 만들어 서로 공유하고, 다음 세대로 전달하였습니다.  인간은 의미의 존재입니다.  어떤 이들은 좋은 옷과 맛난 음식, 안락한 집, 돈, 권력, 쾌락을 멀리하고 오로지 진리, 정의, 신 등의 의미를 구현하기 위하여 목숨을 던지기도 합니다.  암울한 일제 강점기에는 어두운 하늘에서 맑게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며 많은 청년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기꺼이 청춘을 불살랐습니다.  그처럼 인간은 자기 앞의 세계를 해석하며 의미를 캐고 존재 의미를 성찰하며, 이를 지향하는 실천을 합니다.

 

리처드 도킨스는 98.8%의 유전자가 침팬지와 일치하는 생물학적 존재로서 인간은 자신, 자신과 유전자를 공유하는 지식과 집단의 유전자를 늘리기 위해 타인을 약탈해 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사회적 존재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사회를 형성하며 서로 협력했습니다. 인간은 사회와 문명을 수용하는 대가로 이기적 본능과 욕구를 유보하고, 이타적 협력을 바탕으로 사회를 형성하면서 혈연 이타성,  혼혜적 이타성,  집단 이타성을 추구하기 시작하였고, 고도의 이성을 바탕으로맹목적 진화에 도전하여 공평무사한 관점을 증진시키며 윤리적 이타성 또한 추구했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은 선과 악, 이기와 이타가 공존하는 유전적 키메라입니다. 인간은 영장류와 달리 타자에 대한 공감, 이성과 감성의 조화, 정교한 소통, 의미의 창조, 기억의 공유와 집단학습, 시간과 죽음과 신에 대한 인식과 성찰, 도구의 활발한 사용과 노동과 협력을 매개로 한 사회 형성 등의 특성을 보입니다.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 제도, 구조에 따라 인간 내면의 여러 특성과 자질들이 상호작용하면서 선을 더 드러내기도 하고 그 반대로 행하기도 했습니다.중요한 것은 인간의 본성의 선악에 대한 논쟁이 아닙니다. 어떻게 인간이 선을 서로 증장하게 할 것인지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인 동시에 존재의 의미를 성찰하고 더 나은 의미를 지향하며, 실천하는 실존적 존재, 타자와 협력하는 사회적 존재, 더욱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는 미적 존재, 거룩함을 향하여 비속함을 초탈하는 초월적 존재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