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가르치지 않고 배우게 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는 교육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 교사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좋은 책으로 파울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와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페다고지는 문맹퇴치운동을 했던 파울로 프레이리가 쓴 것입니다. 과거에 제국주의 억압에 시달리는 제3세계의 민중들이 있었다면, 오늘날에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낙오된 계층과 지역들이 있습니다.
교육이라는 한자어는 가르칠 敎에 기를 育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가르칠 敎대신 사귈 交를 넣다보면 어떨까요? 일반적으로 교육이라고 하면 선험적 지식과 우월한 지적능력을 갖춘 선생이 자신보다 열등한 학생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지도하는 행위로 여깁니다. 하지만 저는 선생과 제자가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상호적이고 평등한 관계를 맺으며 미래를 함께 살아갈 동료이자 이웃으로서 서로 배우는 것이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교육의 그물망을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의 강력한 중심이 있고 거기에 나머지 개체들이 복속되는 질서가 아니라, 모든 개체들이 동등하고 유기적인 관계맺는 생태주의적 그물망입니다. 가르칠 교敎에서 자귈 교交자로 교육을 재정의하는 것은 이렇게 동등한 관계 맺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의 위계보다는 다양성이 강조되고, 외부평가에 상관없이 자신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들을 탐구하는 것이 배움의 의미입니다.
교육활동은 대부분의 경우 기존체제의 논리를 수용하고 그 체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든지, 반대로 기존체제에 대한 문제제기와 변혁을 통해 새로운 체제를 만드는 역할을 하든지 둘중 하나입니다. 분명히 둘중 하나에 속하는 교육을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교사들은 주입식 교육보다 자율적인 토론이나 대화적 수업을, 그리고 체벌이나 물리적 제재없이 개인의 개성과 본질을 발견하는 교육을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페다고지에서는 대화를 매우 중요시 합니다. 프레이리는 지식을 계속해서 쌓는 적립식 교육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새로운 지식이 파생되고 생성되는 교육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크 랑시에르는 '무지한 스승'에서 대화적 교육만으로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무지한 스승에 의한 교육이 근본적으로 더 해방적인 교육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크 랑시에르는 '무지'보다 '무시'가 교육헌장에서 더 큰 해악이 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학생이 자기 자신을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교사나 학생이나 모르는 것이 있으면 공부하면 됩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 또는 학생을 무시하는 교사는 무지한 교사보다 더 나쁘다는 뜻입니다. 그는 교사가 안 가르치면 학생 스스로가 배운다고 말합니다. 그는 교사가 잘 정리해서 효율적으로 가르치는 것보다 학생 스스로 탐구하면서 원리를 깨달아가는 것이 제대로 된 교육이라고 주장합니다. 어떤 시詩가 뭔지 모르겠지만 무척 어려운 데도 뭔가 대단히 끌리는게 있습니다. 그래서 읽고 또 읽습니다. 그렇게 반복해서 읽으면서 시를 쓰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부모와 교사는 아이가 선택하는 방향을 지켜보면서 도움을 주는 조력자일 뿐입니다. 파울로 프레이리는 빈민촌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브라질의 문맹률이 높았기 때문에 문맹퇴치 운동을 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이 자신과 사회를 인식하는데 가장 필수적인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칠레로 망명했습니다.
1980년대에 자주 사용했던 용어 중 하나가 '의식화'입니다. 프레이리는 의식화라는 말을 단순히 의식을 발달시킨다는 중립적 의미가 아니라, 잘못된 현실을 변혁시킬수 있는 실천과 성찰의 주체를 만든다는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의 교육을 은행 저금식 교육이라며 비판합니다. 교사는 가르치고 학생은 배운다. 교사는 말하고 학생은 듣는다. 교사는 모든 것을 알고 있고, 학생은 아무 것도 모른다. 이런 전제들 속에서 교육이 이루어져 왔다는 것이지요. 교사는 흔히 지식의 권위와 직업상의 권위를 혼돈하거나 자신이 학생들의 자유를 통제할 수 잇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교육이란 A가 B에 관해서 교육하는 것도 아니고, A가 B를 위해서 무엇을 가르치는 것도 아닙니다. 프레이리는 A와 B가 대등하게 소통하며, 변혁을 위한 해방교육의 장을 여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 합니다. 그는 대화를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해방과 실천의 과정으로 파악합니다. 어떤 교사는 학생들에게 토론의 기회를 많이 주고 문답식 교육을 하는 것이 대화식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프레이리가 말하는 대화식 교육은 교수방법론으로서가 아니라, 교육의 기본적인 모델에 가깝습니다. 그런 점에서 새로운 교육은 은행 저금식 교육이 아니라 문제 제기식 교육이어야 합니다. 문제제기식 교육은 안다는 것과 존재한다는 것을 결합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여기서 앎이란 knowledge가 아니라 knowing입니다. 존재도 be가 아니라 being입니다. 다시말해 현재 진행형인 것입니다. 안다는 것과 존재한다는 것은 계속 변화하면서 예정되지 않은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그 과정에서 문제가 새롭게 생성되고 거기서 다시 해결점을 찾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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