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탄핵 당하는 비극적인 현실에 관료와 정치인, 기업인, 언론과 사법제도 등 국가와 사회를 지탱하는 많은 분야의 인물들이 광범위하게 연루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여기에는 부정한 사태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오작동하거나 전혀 작동하지 않는 국가 시스템 속에서 이루어진 거대한 방조와 상명하복, 묵인의 카르텔도 큰 역할을 했다. 사태를 성찰해 본다면 비극의 뿌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광범위하며, 무의식적인 개인 일상의 층위까지 퍼져있는 것은 혹시 아닐까? ... 이 책을 기획한 ‘실천적 생각발명 그룹 시민행성’은 ‘생각할 때 시민이다’라는 명제를 걸고 만들어진 인문 조직이다. 공동체의 삶과 철저히 유리된 지식의 상품화, 제도교육의 공공성 상실, 시민교육의 부재와 시민 사고의 자동화 현상에 따른 사회적 성찰능력의 저하 등을 심각한 사회상황 인식으로 이에 대한 인문적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얼굴이 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아마도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거짓으로 만든 얼굴일리 없다'는 뜻일 겁니다. 사진작가들은 사진 중에 인물 사진찍기가 가장 어렵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얼굴에 힘을 뺄 때까지 계속 찍어야 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대개 얼굴에 너무 힘을 많이 주어 좋은 사진이 나오지 않는다는 거예요.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힘을 빼야 좋은 글이 나옵니다. 힘을 뺀다는 것은 어떤 분야에서나 아주 중요합니다. 생각해 보면 얼굴이 없는 뒷모습을 보여주는 아련함이나 편안함도 바로 힘이 빠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서로 앞모습을 보고 눈을 마주 치면 나도 모르게 얼굴에 힘이 들어가고, 그만큼 상대방도 얼굴에 힘을 주게 됩니다. 그러나 뒷모습을 보면 그런 긴장감이 생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대방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고 신비스러운 느낌을 받게 됩니다.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자기를 보일 때 ‘이것이 바로 나다’라고 말하는 표정이 됩니다. 우리는 이를 주체성 또는 자기 동일성이라 부르고 대개는 좋은 것으로 여깁니다. 주체성을 가져야 한다고 권장하고, 교육하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주체성이 우리가 하는 일을 방해합니다. 수영을 배울 때도 그러합니다. 몸이 물에 떠야 하는데 몸에 힘을 줍니다. 두려워서 그렇습니다. 누군가가 자연스럽고 진솔하게 글을 쓸 수 있다면 그는 이미 문장의 고수일겁니다. 주체성이라는 것은 우리의 모든 행동을 간섭합니다. 어떤 분야에서든 고수인 분들은 주체성이라는 것에 간섭을 않습니다. 미술선생님들은 학생을 속성으로 가르치기 위해 그림을 거꾸로 놓고 그리게 합니다. 바르게 놓고 그리라고 하면 머뭇거리는데 거꾸로 놓고 그리게 하면 잘 그린다고 합니다. 학생이 선뜻 그리지 못한다는 것은 자기주장을 버리지 못하고, 그림을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집이다. 이것은 나무다, 이것은 사람이다.’ 이렇게 말입니다. 그런데 그림을 거꾸로 보여주면 해석이 잘 안되기 때문에 선만 보고 그립니다. 한마디로 강제적으로 주체성을 죽이는 것입니다.
서점에 가면 자기계발서들이 많습니다. '네가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네 책임이다. 열심히 하면 되는 데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 기회가 있었는데 안했다'라고 꾸중하는 책이 대부분입니다. 우리가 주제성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끊임없이 우리 삶에 충고를 해댑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계기로 마음의 밑바닥을 보면 ‘나는 나다’라고 항상 내세우는 나 말고 숨기고 싶은 '또 다른 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생활 보호를 주장하는 이유도 밖으로 내 보일 수 없는 또 다른 내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 또다른 나는 다른 사람이 없을 때 혼자 방안에 있을 때에야 밖으로 나옵니다.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안 나오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안에 결코 자신으로 인정할 수 없는 또하나의 내가 존재합니다. 이것을 인문학에서는 '자기안의 타자'라고 부릅니다. 타자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타자는 우리 밖에만 있는게 아니라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 타자는 주체성에 맞서는 개념입니다. 주체성은 사회적 개념으로 공동체 의식으로 나타날 때가 많습니다. 사회에는 이러한 주체성의 범주에서 제외된 사람들이 늘 존재합니다. 예를 들면 노숙자들이 그런 존재들입니다.
자기안의 타자는 꽁꽁 감춰지고 억압되어 있습니다.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아무도 드러내려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을 다루는 것이 바로 문학입니다. 문학은 우리 안의 타자를 표현할 말을 만들고 그것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어떤 특별한 세계를 만듭니다. 말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하고 싶은 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이 없는 것은 더더욱 아니지요. 바로 이렇게 숨죽인 말들, 숨어버린 생각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문학입니다. 세상에는 이론과 사상이 많습니다, 이론과 사상은 다양한 말을 합니다. 힘 없는 사람들의 다양한 속사정을 섬세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문학입니다. 우리 내면의 문제 어디에도 내놓을 길이 없는 그런 문제들은 개인들 사이에서 연대나 협력이 어렵습니다. 이때 詩는 그 사이에 다리를 놔줍니다. 우리 안에 억압되고 감춰져 있는 생각과 감정, 표현할 방법이 없는 그것들, 심지어 우리 안에 그런 것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조차 하지 못하는 그런 것들을 詩가 표현해 줍니다. 詩는 다양한 방법으로 말을 합니다. 보통 시는 아주 감상적인 것으로 여겨지지만 어느 때는 시도 논리적으로 말을 합니다. 또 어느 때는 말로 그림을 그려서 이미지를 만들어 보여주고, 어느 때는 리듬만으로도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리듬은 노래처럼 쉽게 파고들어 더욱 강력한 힘을 가집니다.
시는 본래 노래하듯 장난치듯 쉽게 쓰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어떤 목적을 갖고 주제와 사상을 강조한다면 논문이나 산문이 되겠지요. 시가 사람을 웃게 하고, 울게 하고, 감동을 시켜주기도 합니다. 내안의 언어가 거리낌 없이 흘러나와야 좋은 시가 되는데 따지다 보니 자기 언어를 감시하게 되고, 그래서 내면의 언어들이 마음껏 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누구나 아무도 모르는 자기만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집니다. 부모 모르게 불량식품 사먹고, 만화를 보고, 동영상을 보는 일 모두를 통제할 수 없거니와 그냥 놔두면 스스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게 됩니다. 그렇게 자라야 몸도 마음도 건강한 어른이 됩니다. 시를 쓸 때도, 수영을 배울 때도 힘을 빼는 것이 중요합니다. 힘을 빼야 주체성이 자리를 비키고 감춰져 있던 생각과 감정들이 나타나 새로운 언어들을 만듭니다.
詩 해석은 읽는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해석하든 문제될 게 없으며,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내면에 숨어있던 어떤 감정이 솟구쳐 나옵니다. 또한 읽는 사람에 따라 감정이 많이 깊게 투사될 수도 있고, 적게 얕게 투사될 수도 있습니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인문학 책이나 사회과학 책들을 읽는 것과는 다릅니다. 잘 모르겠으면 모르는 대로 읽으면 그만입니다.
철학자 니체가 책을 도끼라 했지요. 저는 단단히 굳은 나를 깨부수는 것이 바로 詩語라고 생각 합니다. '나'라고 철저히 믿었던 것들에 금이 가고 의심하게 되는 경험이야말로 시가 우리에게 주는 최고의 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말은 어떤 틀이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을 하거나 말을 할 때는 그 틀 속에 있는 생각의 조각들을 조합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한 사람이 사용하는 조합은 지극히 제한되어 잇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범위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詩語언어가 특별한 것은 일상적인 말의 조합을 비껴서는 침묵의 언어라는 점을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감정을 정확히 표현하려고 애쓰다 보면 오히려 깨져버릴 수 있는 어렴풋한 그 무엇입니다. 노부부가 산위에서 남편이 ‘세상이 참 넓지’라고 말하니 아내가 이때 ‘참 넓네’라고 하는 표현은 두 사람에게 그 감정을 침묵에 부치면서 동시에 표현하는 언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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