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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어떻게 배우는가? ( 존 홀

불가능해 보이는 퍼즐 읽기

무작정 놀아보는 일을 충분히 하기 전에, 조각들이 움직이는 방식에 대한 내적모델을 세우기도 전에, 조각들을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방법을 탐구할 시간을 갖기도 전에, 추론을 해버리는 것이 문제이다. 큐브를 풀려면 큐브가 움직이는 방식에 대해 충분히 알아야 하고 그러려면 먼저 상당한 시간동안 큐브를 가지고 무작정 놀면서 되는 대로 이것저것 해봐야 한다. 그렇게 해서 서서히 큐브의 언어를 알아가야 한다. 나는 아이들이 누리고 있는 이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 존재하지 않는 듯한 느낌, 시간에 대단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그 느낌이 부러웠다. 시간이 충분한 아이들은 큐브와 일종의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결코 증인을 반대하고 심문하는 변호사처럼 굴지 않았다. 그 아이들은 과학자로서 무슨 꽃과 풀들이 자라는지 살피기 위해 들판을 천천히 거니는 식물학자처럼 참을성 있게 새들을 관찰하며,  소리를 듣는 조류 연구가처럼 인위적으로 사건을 일으키려 하지 않고, 그저 절로 일어나는 현상에 정신을 집중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아이들은 조바심과 초조함, 허식을 제쳐둘 수 있었다.

 

문제의 해결방법을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는 큐브를 하면서도 내가 지금 해답에 가깝게 가고 있는지, 멀어 지고 있는지 알수가 없기 때문에 좌절하게 되고, 욕구불만이 쌓인다. 실수를 통해 배울 수도 없다. 실수를 하고 있는지 조차 알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건 음악과는 전혀 다르다. 음악을 할 때는 적어도 내가 실수를 하고 있는지 여부는 알 수 있다. 무슨 실수를 했는지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는지도 알 방법이 있다. 하지만 큐브는 다르다. 어둠속에서 비틀비틀 제자리를 맴도는 이런 기분은 딱 질색이다. 내가 여기서 교육자와 심리학자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다만 아이들을 보라는 것이다. 참을성 있게 다시 또다시  존중하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보라고.  당신들 대부분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 즉 아이들의 진면목에 대해 어느정도 정확한 모델을 가지게 될때까지는 아이들에 관한 이론을 만들거나 판단을 내리는 일 따윈 뒤로 미루고 말이다.

 

나는 연역적이고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추론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다만 나는 그것이 부적절한 장소에서 남용될 때는 쓸모가 없을뿐 아니라 해를 끼치기 쉽다는 점이다.  따라서 아무 데서나 쓰면 안 된다는 점을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현상이 우리의 추론을 뒷받침해주는 것처럼 보인다할지라도, 그게 절대적인 진리의 발견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더욱이 이런 종류의 추론이 전혀 통하지 않을 때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선입관을 버리고 판단을 미룬채 상황에 자신을 열어놓고 최대한 많은 데이터를 받아들여야 한다. 카오스에서 질서가 나타나기를 끈기있게 기다리면서 말이다.  짧게 말해서 그건 어린 아이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뭐가 뭔지 파악하기 힘든 것과 마주했을 때, 우리의 마음은 그것을 무시하고 내쫓아버리려 한다. 다행히도 나는 이런 반응이 방어적이고 비겁한 수작임을 알게 된 이후부터, 그렇게 하지 않기로 결심했기에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좀 더 주의 깊게 조사해보면서 지적인 의문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이건 뭐하려고 있는거지?  이건 어디로 연결되는 거지?  하지만 그 또한 아무 소용이 없었다.

 

'배움이란 무언가에 대해서 네가 지금까지 알아온 것을 기억해봐.'  나는 다른 사람들의 유식한 화술에는 신경을 끈 채, 나 자신이 내게 말하는 대로만 했다. 뭔가 중대한 일이 내 정신의 비언어적이고, 무의식적인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다는걸 느낀 나는, 혹시나 그 과정이 멈춰버릴까 두려워 너무 열심히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