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어를 처음 배우는 과정에서 나는 간판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 시절에만 해도 대부분의 유럽상점들은 어릴 적 내가 본 뉴욕의 세탁소 처럼, 이 가계가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 알려주는 간판을 달고 있었다. 그걸 보면서 나는 단어들을 혼자 쉽게 익힐 수 있었다. 만약 아이들이 글쓰기는 말을 하는 한 방법이고, 읽기는 다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는 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면, 훨씬 더 즐겁고 생기발랄한 마음가짐으로 글을 쓰고, 읽을 수 있지 않을까싶다. 나는 아이가 처음 시도한 '알 수 없는 낙서와 글쓰기'의 관계가 아기의 첫 재잘거림과 말하기' 의 관계와 같다는 것을 이해한다. 아이의 글쓰기 옹알이를 격려하고 북돋워 주어야 한다. 그러면머지않아 그 아이는 자신의 글이 다른 사람의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어떻게 하면 똑같이 만들 수 있을까' 그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할 것이다. 아이들은 여러가지 길을 통해서 세상을 탐구할 수 있다. 그 길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러므로 나의 행동이 아이가 걸어갈 수도 있었을 어떤 특별한 길을 가로막았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괴롭다. 새로운 일을 시도하려는 아이들은 조그만 연두색 싹을 내미는 식물과 같다. 우리는 그 싹을 잘라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많은 아이들이 읽기보다 쓰기를 먼저 배운다. 쓰기에 먼저 도전하는 아이들은 아주 주관적이긴 하나 논리적이라고도 할만한 음성 중심의 스펠링으로 시작한다. 그런 다음 예전에 말을 익힐 때 자신의 말이 주변 사람들의 것과 똑같아지도록 서서히 조정해 나갔던 것처럼, 아이들은 더 많은 글자를 보고 읽기를 배우는 과정을 통해 자신이 쓰는 글자가 주변사람들의 것과 같아지도록 다듬어간다. 아이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고, 그것을 전달하고 싶어 글을 쓴다. 아이는 자기가 쓰고 있는 내용에 관심이 있었지, 그 내용을 쓰는 방법에만 관심을 두었던 것은 아니다.
도전이란 어떤 사람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시키는 일을 말한다. 도전은 그 능력을 확신하게 만드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사람은 성공할 수 있다는 충분한 자신이 있을 때 도전하고 싶어한다. 반면 자기가 이룩하거나 대처하기에는 뭔가 부족할 것 같아 보이는 임무는 위협이 된다. 아이는 스스로 목표를 세우면서 늘 도전할 자세가 되어 있었다. 아이는 이미 성취한 일을 반복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점점 더 어려운 임무를 향해 나아갔다. 만일 도전이 가능한 조건이 주어지고 또 그것을 관찰할만한 시간과 공간이 허락 된다면, 많은 아이들이 수업시간에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모든 아이들은 자라면서 이렇게 한다. 그러나 학교에 가면서부터 아이들은 도전을 위협으로 보게 된다. 혹시라도 실패하게 되면 거의 반드시 비난을 받거나 창피를 당하고, 심지어는 벌을 받게 되는 것이 더 큰 이유다. 결국 아이들은 날마다 반복되는 이런 위협으로부터 요령있게 빠져나가거나 달아나는 데 익숙해지고, 그러다 보면 스스로 도전하는 습관을 점점 잊게 된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배운 두려움은 인생 전체를 오염시킨다.
우리는 기술을 먼저 획득한 다음 그 기술을 써서 할수 있는 유익하고 흥미로운 일거리를 찾는다는 식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사리에 맞는 최선의 방법은 그 반대이다.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먼저 시작하고, 그런 연휴에 그것을 하고자하는 강렬한 욕구에 자극을 받아 필요한 기술을 익히는 것이 옳다. 이는 아이들의 쓰기와 읽기에도 적용된다. 먼저 쓰기와 읽기가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를 위해 꼭 필요한 수단이라는 것을 아이들이 느끼도록 도와주는 것으로 시작한다면, 우리는 굳이 아이들 에게 쓰기와 읽기에 관한 기술을 익히라고 꼬드기거나 들볶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아이들 스스로 그 일에 필요한 기술을 익히고 싶어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들은 자기보다 큰 아이들이 하는 것을 하고 싶고, 또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함께 있으면 그런 욕구에 불이 붙는 건 시간문제다. 또한 교실에는 아이들이 읽을 수 있거나, 혹은 읽는 법을 알아내는데 도움이 되는 여러종류의 교재들이 있다. 아이들이 원할 때 조언과 도움을 줄만한 사람도 많다. 다시말해 그곳은 아이들이 뭔가를 발견해낼 수 있는 자료와 증거물과 사람들이 가득한 보물창고인 것이다. 단지 교실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권리를 줌으로써가 아니라, 아이 들이 무엇을 언제 어떻게 배울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 때, 가장 잘 배우고 가장 많이 기억한다는 원칙 아래 학교를 운영하는 것이 좋다.
찰스 래스본이 편집한 '열린교실 열린 교육'의 서문에 나는 이렇게 썼다. ‘‘....영국에서는 다음과 같은 전통이 있었다. 학교와 교사들이 가장 잘 알고 있으니, 학부모들은 학교 일에 참견해서는 안된다는 얘기다... 그리고 아이들 부모의 대다수는 자기 아이가 나중에 대학에 갈거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들은 학교와 학교에서의 성공을 사다리를 올라가게 만드는 중요한 수단으로 보지도 않았다. 이런 전통적 태도는 이제 바뀌고 있지 않나 싶다. 그것은 어른들이 학교를 아이들의 전 인생에 걸쳐서 계속될 경주의 출발점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혁명은 엘리트라고 자임하는 일단의 사람들에 의해 이미 위협받고 있다. 그들은 영국을 엄격하고 계층이 분명하게 구별되는 사회로 유지시키고 싶어한다. 이와 같은 열린 교육의 적들은 그에 환호하는 지지자보다도 이런 종류의 학교 교육이 장기적으로 불러올 정치사회적 결과를 훨씬 더 잘 파악하고 있다. ....
최고로 좋은 유아학교들은 정말로 멋진 곳이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학교들은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곤 세상과 단절되어 있으며, 우리 사회의 시대적 문제나 위기와도 단절되어 있다. 그들은 이 시대의 젊은이가 어떻게 자라야 하는지, 어떻게 이 문제들을 대면하게 될 것이고 또 대면해야 하는지와 같은 질문들을 피하고 있다. ... 학교들은 한 아이의 전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부분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 하기보다는 그저 아이들로 하여금 고달픈 인생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막간이 되고자 한다. .. 한쪽이 열린 교육의 철학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상상력과 열정을 꽃피우고 있었다면, 다른 한쪽은 그 철학이 뭔지 이해하지도 신뢰하지도 못하면서 상부에 있는 누군가가 원하는 것 같으니까 마지못해 회의적으로 열린 교육을 흉내내고 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자기를 존중하고 신뢰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너무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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