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떤 그림이 진짜 실물처럼 보인다고 말하고, 또 그렇게 믿곤 한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실물엔 깊이가 있는 반면, 그림은 평평하다. 그러므로 실재하는 물체를 평평한 그림으로 바꾸는 작업엔 일종의 약속이 개입한다. 언어처럼 말이다. 그리고 언어와 마찬가지로 그 약속도 배워야 한다. 아이들은 우리가 나무라고 부르는 복잡한 실체를 모든 색깔과 형태, 결, 부피, 명암속에서 바라보고 있었기에 그중 어떤 성질을 어떤 방법으로 표현해야 할지 모른다. 아이들은 나무를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자기들이 알게 된 나무의 상징을 그렸을 뿐이다. 거대한 상형문자를 그리듯이 말이다. 베티 에드워드의 책 ‘우뇌로 그림 그리기’를 읽으면서, 나는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그림을 못 그리는지, 그리고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그림을 못그리는 이유는 사물에 대한 시각적인 상징들로 머리가 가득차 있어서, 사물의 진짜 모습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눈은 이렇게, 코는 저렇게 입은 이렇게 생겼다고 그리하여 진짜 얼굴을 그릴 때가 되면, 우리는 이 상징들을 종이에 쏟아 놓는다.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무릇 코는 이렇게 생겼다고 하는 상징은 일단 잊어버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특별한 코가 어떻게 생겼는가를 진짜로 보는 법이다. 이것은 약간의 지식과 쓸모있는 기술, 그리고 얼마간의 생각과 연습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적어도 평생이 걸리는 작업이 아니며, 사람에 따라서는 아주 짧은 기간 안에 터득할 수도 있다. 내가 이때까지 보아온 어떤 아이보다도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소녀가 있었다. 그 아이는 다만 자기 방식대로 사물을 관찰하고, 보이는 그대로 그렸던 것 뿐이다. 그 아이에게 그림은 세상에 관해 배운 것을 표현하는 도구인 동시에 사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배우고, 다듬을 수 있는 유용한 방편이기도 했다. 학부모들은 아이들의 진도에 관해 끊임없이 걱정을 했고, 아이비리그행 특급열차가 시간표에 맞게 달리고 있는지 아닌지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리하여 마침내 아이들에게는 편하게 그림을 그릴만한 시간이 없다.
학교를 다니는 여섯 살짜리들은 매우 진지하다. 그리고 어른들이 무엇을 가치있게 여기는지에 아주 민감하다. 훗날 그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게 될 때에는 현실과 접촉하는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게 될 수도 있다. 어깨너머로 '이래라, 저래라' 시키거나 '잘못 그렸니, 뭐니' 잔소리를 늘어놓는 사람없이, 커다랗고 엉성한 원색적인 그림이나마 마음대로 그릴 수 있게 격려를 받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은 일이다. 하지만 미술 활동의 의미와 가치는 그 이상이다. 미술 활동에는 아이들이 꿈도 못꿔본 가능성이 있다. 아이들은 그런 가능성을 접할 기회를 더 많이 가져야만 한다. 적어도 그림 그리기가 단순히 기분전환을 위한게 아니라, 현실과 접촉하고 현실을 표현하는 아주 강력한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노출되어야만 한다. 어떤 아이는 책을 통해, 또 어떤 아이는 건축이나 기계를 통해, 현실을 탐구할 수도 있다. 그리고 과학분야중 하나를 택해서, 그 분야가 요구하는 실험을 통해 세상을 탐구하는 아이도 있을 것이다.
아주 어린 아이라 할지라도, 고품질의 미술재료를 접해볼 기회를 자져야 한다는 웨슬리씨의 의견에 나는 완전히 동의한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좋은 미술재료를 주의깊게 사용하는 방법을 보여주어야 한다. 나쁜 도구의 한계에서 벗어남으로써, 아이들은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더 깊게 탐구하고 표현하고, 넓힐 수 있기 때문이다. 아주 어린 아이들도 일을 잘하고 싶어한다. 어른들만큼 말이다. 게다가 아이들에겐 여러 가지 도구를 사용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완벽한 능력이 있다. 예술은 많은 아이들에게 바깥세계와 내면세계를 탐구하고, 거기서 배우고 느낀 점을 표현하게 해주는 아주 강력하고도 근본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예술은 장식이 아니라, 중심적인 인간 활동이자 필요불가결한 일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감히 소홀히 하고 있다. 미술활동은 눈과 손뿐만 아니라, 두뇌도 훈련시킨다. 어떤 책에도 답이 나와 있지 않아 스스로 풀어야만 하는 진짜 문제를 던지는 상황이나 활동이야 말로 우리의 지성을 연마시킨다. 숙련된 화가나 장인, 공예가들이 대부분 머리 좋은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그들의 정신은 활동적이고 창의적 이다. 아이들에겐 장인 정신이 있다. 으르고 달래서 구워 삶으려는 사람이 없을 때 아이들은 일에 더 끈질기게 매달리고, 더 잘하고 싶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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