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어떤 소리를 계속해서 내는 것은, 아마 우연히 이 소리를 냈는데 소리 자체와 소리가 나올 때 입에서 느껴지는 감이 좋아서 계속하는 것 같다. 아이들에겐 소리를 낼 때의 느낌이 소리, 그 자체 만큼이나 중요한 것 같다. 아기들을 관찰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일술사이로 혀를 떨어서 소리내는 법을 발견했을 때 아기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 분명 그건 아기들이 발견한 것이다. 아기는 즐거운 듯이 작은 소리를 내며 누워 있다. 그때 갑자기 발성기관의 어떤 새로운 조합으로 작고 높게 까르륵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주 어린 아기들은 자신이 내는 소리를 조절하지 않는다. 대개는 어떤 소리를 우연히 내고는 그 느낌과 소리가 좋아서 다시 내보려고 한다. 아마도 시간이 좀 지나면 훨씬 더 의식적으로 주변에서 듣는 소리를 흉내 내보려고 할 것이다.
학생들과 아이의 차이는 무엇일까? 학생들은 불안과 자의식에 가득 있었지만, 아기는 그렇지 않는게 아닐까. 보다 근본적인 의문은 '아기들은 도대체 왜 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것일까' 하는 점이다. 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저 본능적인 행동일까? 인간과 접촉없이 성장한 것으로 알려진 아이들은 거의 벙어리나 다름없다. 우리는 아기들이 말을 할 생각을 하게 되는 이유는 분명히 주변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를 듣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처음으로 소리를 낼 때 아기들은 주변의 소리를 흉내내는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 소리를 지어내는 것일까? 아마도 처음에는 지어내는 것이고 좀 더 나중에 흉내를 내는 게 아닌가 싶다. 아기들은 말하는 기능을 먼저 익힌 후 그것을 말하는 데 활용하는 식으로 말하기를 배우지는 않는다. 아기는 말을 하면서 말하기를 배운다. 말하기를 시작하는 아기는 말이라고 구별해낼 수 있는 소리를 내기 훨씬 전에, 아니 말을 이해하기도 전에 자신의 예리한 관찰력으로 자기보다 큰 사람들이 입을 가지고 만들어 내는 소리가 그들의 다른 일에 영향을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안다. 아기들이 볼 때 큰 사람들의 말은 어떤 일이 일어나게 만든다. 아기는 정확하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수 있다. 하지만 아기는 말하는 어른들의 무리에 끼고 싶다.
아기는 내가 말하는 소리를 그저 흉내낸게 아니라, 나와 함께 진짜 대화를 나누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깨달았다. 아기가 나에게 어떤 의미를 전달하려고 했는지는 알길 없다. 하지만 거기에는 분명 거기에는 분명히 어떤 뜻이 있다. 아기들은 주변의 큰 사람들처럼 목소리로 메시지를 전달하려 한다. 그리고 자신의 메시지가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느 시기에 아마도 한 살반이나 두 살쯤 되었을 때, 아이는 자기가 보내는 메시지의 대부분이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자기는 다른 사람들처럼 얘기할 수 없고, 그 방법을 배우려면 지금부터 많은 수고를 해야만 한다는 점이 명백해지는 것이다. 두 살배기들이 흔히 골칫덩이가 되는 이유중 하나는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요구할 것, 느낌과 생각, 깨달음 등 말하고 싶은 것들이 가득 차 있는데 정작 말할 방법이 묘연하다면 당연히 그렇지 않겠는가.
우선 말을 하려면 입술과 혀, 이, 입천장, 턱, 뺨, 성대, 호흡 등이 서로 조화롭게 협조해야 한다. 또한 말할때 필요한 근육의 조절은 우리가 배우게 되는 것들중 단연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기술이다. 최소한 골치아픈 어떤 악기를 연주하는 데 필요한 기술과 맞먹을 정도는 된다. 모국어와 아주 다른 언어를 처음 발음할 때 우리는 말이 얼마나 어려운 건지 실감할 수 있다. 갑자기 입과 혀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거의 모든 아이들이 자신의 모국어를 다 발음한다. 하나 이상의 언어를 쓰는 곳에 살고있는 아이는 그 모든 소리를 다 낼 수 있다. 어이들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해답은 참을성 있고, 꾸준한 실험에 있다. 아이는 수천번씩 소리와 음절, 단어를 발음해 보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자신이 낸 소리를 주변 사람들의 소리와 비교해 보면서 서서히 자신의 소리를 다른 사람들의 소리와 맞추어간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그일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틀리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말하는 법을 가르치려 한다면, 아이들은 절대로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할 것이다.
말은 소리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아이가 말하는 법을 배우려면, 그전에 먼저 모국어의 모든 음소를 소리내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에 따라 음소 목록을 작성하여 소리를 가르치려 할 것이다. 음소목록 다음에 작성되어야 할 것은 음절과 단어목록이다. 음소목록에 있는 소리를 내는 법을 배운 아이는 이제 그 소리들을 음절로 연결시키는 법을 알아야 한다. 어떻게 문장으로 연결되는지에 관한 문법도 가르칠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진도를 얼마 나가기도 전에 좌절하고, 두려움에 빠져 결국 그만둘 것이다. 아기들과 어린아이들은 어른들의 대화를 듣는 걸 좋아하며, 오직 그 대화를 듣기 위해서 오랜 시간 조용히 앉아 있기도 한다. 그러므로 아이들에게 말을 걸어주는 것은 그들이 말을 배우는 것을 돕는 한가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자연스럽고 꾸밈없이 한다는 전제 아래서이다.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우리의 생각과 달리 굉장히 주목할 만한 일이다. 콩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우리는 콩이 속해 있다고 생각되는 집단을 자기의 관심사에 따라 분류해 낸다. 만일 정원사라면 콩을 지지대가 필요한 덩굴식물로 여길 것이다. 또 요리사라면 콩을 요리하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하는지, 요리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필요한지 등을 생각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물체에 이름을 붙일때 우리는 그것을 적어도 한가지 점에서는 비슷한 물건들의 집단에 집어넣고, 그 집단에 속한 물건 전체에 똑같은 이름을 붙인다. 방안의 의자를 볼때 우리는 그 의자가 방의 다른 위치에 있거나, 다른 방에 있는 모습까지도 예상해 볼 수 있다. 또한 방에서 의자만 따로 떼어내어 단독으로 있는 모습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아기에게 의자는 자신이 보는 방 속에 포함되어 있는 빼낼 수 없는 요소다.
심리학자 허먼 위트킨박사는 ‘정신적 분화’라는 책에서 '어린 아기의 세계는 분화되지 않았다'고 표현한다. 아기들의 세계는 조각으로 나눌수 없다. 하지만 점점 커지면서 아기는 방을 서로 독립되어 있는 물체들의 모임으로 보기 시작한다. 아기가 이렇게 한 걸음 내딛는 것을 가리켜 ‘분화된 세계에 대한 심상, 혹은 내적모델을 만든다’고 말한다. 아기는 우선 머릿속에서 집단을 만들어내야만 거기에 이름을 붙일수 있다. 그러므로 사물의 이름을 부르는 일은 단순히 맹목적인 모방이 아니다. 그것은 지성의 창조활동이다. 물건들을 집단으로 묶고 거기에 이름을 붙이는 이 정신활동을 나는 '추상적인 사고'라고 밖에 부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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