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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허버트 스펜

교육제도의 병폐

젊은이가 인생의 의무를 감당할 수 있도록 이를 준비시키는 것은 부모와 교사가 존재하는 목적이다배운 지식의 가치와 이를 가르치는 방법의 정수는 이 목적에 부합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보인다. 사고력뿐만 아니라, 과학지식을 늘려야 한다는 필요성도 대두 되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자녀를 시민 신분과 사회에 걸맞는 사람으로 기르는데 관심이 있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지위를 위해서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않다. 부모의 지위를 두고 하는 말이다. 생계를 꾸리려면 준비가 필요하지만, 자녀를 기르는 데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자부하는 모양이다정작 가장 중요한 책임 즉, 가정을 세우고 가꾸는 일을 위해서 단 한시간도 쓰는 법이 없다. 너무 쉬워서 그런가?  그렇지도 않다.  어른이 감당해야 할 본분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가정을 이루고 가꾸는 일이다.

 

우리가 인정해야 할 점은  부모의 행복이나 자녀를 비롯한 먼 자손의 성품과 인생에 미치는 영향을 떠나 청소년의 지덕체 계발에 대한 바람직한 방법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흔히 자손을 낳을 수가 있는 때가 되면 몸이 성숙했다고 하듯, 자손을 가르칠 수 있는 때가 되면 머리가 성숙했다고 이야기한다모든 주제를 전부 포함하여 인간의 교육이 완성해야 할 주제는 바로 교육의 이론과 실제다. 적절히 준비하지 않으면 자녀를 바르게 키울 수 없다.  대개의 경우 부모는 그때그때 내키는 대로 처신한다. 아이가 제대로 성장하기 위한 방법을 심사숙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옳고그름에 상관없이 시시때때로 달라지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뿐이다.

 

일반적으로 부모의 도덕교육은 1교시에는 순수도덕론을 아이에게 읽어주고, 2교시에도 자신이 유리하게 적용할 수 있는 도덕론을 읽힐 것이다.   3교시에는 '아빠가 그렇게 하는 것 안보이니?' 라고 물었다면 , 4교시에는 '넌 아직 어리잖니? 그건 어른만이 할 수 있는 거란다'라고 할 것이다.  5교시가 되면 '가장 중요한 목표는 출세해서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이란다'라고 가르치고, 6교시에는 '사람의 가치는 잠깐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거란다'라고 귀뜸해 줄 것이다. 7교시에는 '불의를 보더라도 참고, 이웃에게 친절을 베풀어라'고 주문했다면, 8교시에는 '누가 때리면 과감히 맞서야 한다'고 가르치고,  9교시에는 '시끄럽게 떠들어서는 안된다'고 야단쳤다면,  10교시는 '가만히 앉아 있어서는 안된다'고 조언할 것이다. 11교시에는 '부모님 말씀을 잘 들어라'고 주문했다면 12교시에는 '너가 알아서 하면 되지'라고 일러둘 것이다.  이처럼 부모는 시시각각으로 소신을 달리 함으로써 자신이 일방적이고 부당한 주문을 할 것이다.

 

교육제도는 정치제도와 마찬가지로 만든다기보다는 발전한다고 해야 옳고, 발전을 감지할 수 없는 기간도 더러 있다. 발전이 있다는 것은 곧 수단을 활용한다는 증거이며 수단중 하나가 바로 토론이다. 도덕을 주관하는 제도가 아이를 바람직한 인간상으로 만들수 있고, 부모도 이 제도를 머릿속에 주입할 수 있다고 해도 장래의 목표를 달성하기는 어려울듯 싶다.  청소년 훈육을 논하는 사람은 잘못과 애로를 모두 아이 탓으로 돌리고, 어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단정하는 오류를 범하기 일쑤다. 잘 되면 부모탓 못되면, 아이덕분이라고 하니.  가정을 다스리는 일이 국정과 대동소이한 실정이다.  남녀는 가정관계를 통해 변화를 겪게 마련이다.  나는 가정의 불화가 대개 아이의 뒤틀린 성미에서 비롯 된다고 하나, 실은 부모의 잘못이 화근임을 자신있게 주장한다. 물론 약자를 뭉게고 해코지하는 식으로 잔혹한 성정을 보이는 극단적인 사례가 있긴 하지만, 이는 많은 가정에사 나날이 볼수 있는 감정과 행위의 정형이기도 하다.  넘어진 아이를 얼른 일으켜 세우며 ‘잘보고 다녀야지 멍청아!’ 라고 타박하는 엄마라면, 자주 화를 내지 않든가? 아이는 앞으로도 계속 욕을 먹을게 뻔하다.

 

'조용히 앉아 있으라'는 말은 몸을 가만히 놔두지 못하는 아이라면 짜증을 들어야만 말을 듣게 만드는 것이고, 열차밖을 보지 말라는 말은 지성이 발달한 아이라면 탐구할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니, 이 역시 공감의식이 매우 부족하다는 증거가 되지 않겠는가? 부모가 모범이 되어있지 않으면, 훈육이 제대로 이뤄질리 없다. 어떤 교육이든 근접한 목표는 인생의 과업준비(품행이 바르고 출세할 수 있는 시민을 기르는 것아니겠는가?  출세(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가정을 바로 세우기 위한 수단을 뜻한다) 한 사람이 현사회의 적임자라는 의미일까?  지나치게 청렴하고 품행이 매우 방정하면, 삶이 오히려 힘들어지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찬사받아 마땅하더라도 사회와 자손은 되레 자멸하지 않을까? 가정의 개혁은 다른 개혁과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 순수한 정의가 현실과 동떨어진 것 같아도 정의가 어디있는지는 알고 있어야, 앞으로 시도할 개혁이 정의에서 멀어지지 않을 수 있다.  가정도 그렇다. 이상적인 도의를 인정해야 그리로차츰차츰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구조적 보수성향은 항상상 강하기 때문에 급격한 개혁이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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