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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허버트 스펜

체벌의 진짜 문제

아이가 행동의 결과를 자주 체득케 하는 것이 자연의 집행자겸 해석자인 부모의 역할이 아닐까?  대부분의 부모가 그렇게 하고 있다고 주장할 사람도 많다. 즉 부모의 체벌은 대다수의 경우 잘못에 대한 결과라는 것이다.  분노, 폭행, 폭언은 아이가 잘못을 저지른 결과이며,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고통으로써 아이는 잘못에 대한 자연적 반응을 체험하게 된다는 식이다. 부모가 말썽쟁이 아이를 꾸짖거나 벌을 주는 것은 부모가 손을 쓴 결과라고도 볼 수 있고,  어떤 면에서는 말썽에 대한 자연적 대응으로 봄직도 하다.  교육제도는 정치제도와 같이 인간의 본성이 허용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다. 상스러운 부모밑에서 자란 상스러운 아이에게는 부모가 그랬듯 상스런 방법으로 자유롤 제한해야 할지도 모른다. 악랄한 어른으로 구성된 사회에 적응시키려면, 악랄한 방법이 제격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개화된 사회의 교양인이라면 불쾌감을 표출하더라도, 폭력은 덜쓰고 조곤조곤 해결할 방도를 찾을 것이다.

 

대다수의 부모는 현행 교육제도의 원칙을 존중하여,  자녀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부자연스러운 반응으로 자녀를 체벌하고 있다.  우리가 주장하는 규율이란, 대개 아이의 행동에 대한 결과에 대해서 부모가 개입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아이의 행동에서 자연스레 비롯된 결과를 경험하는 것을 가리킨다.  건전하고 유익한 결과는 부모가 자연의 대리인 자격으로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스스로 그렇게 것에서 비롯되었다. 아이는 잔소리만 듣게 될 뿐이다. 반면, 정상적인 과정을 일관성 있게 적용하는 현명한 부모도 적지 않다. 물건을 제자리에 두는 일이 방을 어지럽힌 잘못의 결과라는 이야기다. 불량한 행동에 대해 자연이 벌칙을 준다면, 반항의 결과로 나타나는 이후의 반응을 일깨워 주는 것이 수순이다.  예컨대 방을 어지럽히고도 청소를 게을리한다거나 하기 싫다고 칭얼댄다거나, 혹은 이를 딴 사람에게 맡기려 한다면, 문제를 일으킨 수단을 쓰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벌칙은 아이가 가장 예민할때 꺼내면 된다. 장난감이 간절한 아이는 욕구를 참게 마련이다. 일관성 있게 반복하면, 어떤 잘못이든 바로잡는데 큰 보탬이 되는 영향력을 두고 하는 말이다.  아울러 만족은 수고라는 정당한 대가를 치러야 만끽할 수 있다는 교훈을 아이가 조기에 배운다는 점도 덧붙이고 싶다. 일관되고 반복되는 경험을 통해 개념이 확고해진다는 것이다. 행동에 대한 결과를 이성적으로 의식때에만 바른 품행을 보장할 수 있다. 권위로 밀어붙여서 될 일이 아니다.  장난감을 어지럽히면 나중에 치워야 하는 수고가 따르고, 조심성이 없으면 귀중한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망가뜨린다는 경험은 아쉬움의 결과뿐 아니라, 그 원인을 학습하는 계기도 될 것이다. 어른이 체득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반면 꾸지람을 듣거나 인위적 벌칙을 받는 아이는 조심성이 없어 벌어지는 결과를 경험하지만, 옳고 그른 행동의 근본적 특성에 대해서는 배울 기회가 없다.  '보상과 체벌'이라는 악습은 잘못에 대한 자연적 결과를 잔소리와 꾸중으로 대신함으로써,  도덕교육의 기준을 망가뜨리고 있다.

 

억제력이란 바람직하지 않은 경험으로 학습되지 않는 자연적 반응을 일컫는다.  자연적 규율은 순수한 정의 규범이며, 아이도 그렇게 의식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릇된 행동에서 자연스레 비롯되는 불편한 결과를 감내한 아이라면, 부당한 대접을 받았다는 불평을 늘어놓을리 만무하다.  벌칙의 대가를 치르면서 벌칙과 그 원인의 관계를 끊임없이 의식하지 않을까? 기분이 썩좋지 않겠지만 규범을 어느 정도는 명쾌히 이해하지 않을까? 이같은 규범에 일관성이 있다면, 즉 옷이 너무 일찍 망가졌다거나 규율 차원에서 일정기간이 지나기전에는 새 옷을 사주지 않는다거나, 혹은 멀쩡한 옷 없이는 소풍이나 잔치에 데려가지 않는다면,  벌칙에 야속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원인을 따져볼 것이다. 조심성 없이 벌어진 결과라는 사실을 그때 깨닫게 된다. 즉 잘못과 벌칙의 관계가 전혀 없을 때와는 달리 부당하다며 하소연 하는 일은 없을거라는 이야기다. 

 

평소 부모는 행동에서 하나는 가정준칙을 계속 만들어내고, 또하나는 준칙을 통해 부모가 자신의 우월성과 권위를 과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슨 잘못이든 부모의 심기를 건드리면, 부모의 분노를 자극하는 꼴이 될 것이다. 자연의 필연적 반응에서 비롯된 벌칙은 인간이 아닌 대리자가 규정한 것으로 분노를 자극 하더라도 미미한 수준인데다 금방 사그라지는 반면, 부모가 규정한 벌칙은 분노를 솟구치게 하고 이를 오랫동안 지속시킨다. 그렇게 되면 화를 낼 일이 지금보다 더 많아지지 않을까? 부모와 자녀 모두에게 만성분노조절 장애가 걸리진 않을까?  여동생 장난감을 고의적으로 혹은 막 다루다가 망가뜨린 아들을 타박하던 아빠가 장난감을 사준다면, 근본적으로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 아빠와 아들 모두 분통을 터뜨릴게 뻔하다.

 

장난감은 아이가 물어주야 하니 용돈에서 필요한 만큼을 빼겠다고 하면, 서로의 감정이 크게 상하진 않을테고, 용돈을 빼앗길 수도 있겠다 싶은 아들은 공정하고도 유익한 결과를 몸소 체험하게 될 것이다. 여컨대 자연적 반응이 주도하는 규율 때문에 성질이 괴팍해 질 가능성은 비교적 낮다.  쌍방이 순수한 정의를 인식하고, 인간이 아닌 자연의 대리자로서 부모라는 인간 대리인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부모든 자녀든 화가 날 상황이 벌어지거나,  둘중 어느 하나만 화를 내더라도 서로의 관계에는 해로울 밖에 없다.  남녀노소룰 막론하고 경험상 불쾌한 감정과 연관되는 대상에서 생기게 마련이다. 처음에는 애착을 느꼈을지라도 불편한 인상을 체감한 빈도에 따라 애착이 점차 사그라지거나, 혹은 혐오감으로 바뀔 것이다. 부모가 화를 내며 잔소리와 힐난만 일삼으면 자녀와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자녀가 자꾸 짜증을 내며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 자녀에 대한 부모의 애정이 식다가 아주 차가워질지도 모른다. 부모 자식간 관계가 소원해지면, 도덕성을 함양하는 데 엄청난 지장을 초래할 수 있어 부모는 자녀와 부딪 치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따라서 자연적 결과를 적용하는 대안,  즉 자연의 순리대로 벌칙을 가함으로써 벌칙의 대리자 역할에서 벗어나 관계가 틀어지거나, 소원해지는 불상사를 방지하는 대안을 적절히 활용해야할 것이다.

 

자연적 반응을 체험함으로써 도덕성을 함양한다는 대안은 유아와 아동뿐 아니라, 성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장점을 열거하자면,  첫째는 아이가 결과를 몸소 경험하기 때문에 옳고 그른 행동을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제 잘못으로 아쉬운 결과를 자초하였기 때문에  벌칙의 공정성을 다소 분명히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아이는 벌칙의 공정성을 깨닫고 수고를 통해 벌칙을 감당하기 때문에 기분이 덜 상하는 반면, 부모는 자연적 벌칙을 감독하는 수동적 입장이므로 냉정을 잃지도 않을 것이다. 끝으로 서로 아웅다웅할 일이 없어 부모와 자녀의 감정은 훨씬 유쾌해지고 유대감도 돈독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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