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교육에는 결함이 많다. 아동교육이 바른 길잡이가 되도록 도와줄 지식을 부모가 모르기 때문이다. 해결책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가장 난해한 문제가 발생한다면,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사람을 교육하는 것이 비교적 단순해 보여도 아무런 준비없이 아이를 감독하고 통제할 수 있겠는가? 교육을 빼느니 차라리 기술을 포기하는 편이 낫다. 한 아버지가 아무런 검증없이 잘못된 도그마를 받아 들여서 살다가 아들과 관계가 멀어졌다면, 아들을 반항아로 만들어 인생을 망치고 자신도 불행한 인생을 살았다면, 지나친 공부로 아이의 몸이 허약해 비탄과 가책으로 몸을 가누지 못한다고 치자. 그때 단테의 작품을 원어로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무슨 위안이 되겠는가? 인간의 세번째 영역인 자식훈육을 수행하려면 생명의 원리를 알아야 한다. 생리학의 주요 원리와 심리학에 대한 기초 지식이야말로 바른 육아를 위한 필수요건이다. 아동의 신체적, 정신적 발달이 특정 원리를 철저히 따른다는 점을 비롯하여 부모가 이에 순응하지 않으면, 아이가 연명할 수 없다는 점과 순응하는 정도가 미흡하면 신체적, 정신적 결함이 나타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원리에 온전히 순응해야 아이가 성숙해진다는 점은 누구나 수긍할 것이다.
이번에는 부모 역할에서 시민의 역할로 주제를 바꿔보자. 우선 시민의 역할을 발휘하는데 있어 가장 필요한 지식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마지막 경우와 같이 시민의 역할에 필요한 지식도 보통은 내버려진곤 했다. 가장 뚜렷한 입지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단연 역사지만, 학습으로서의 역사는 길잡이 역할을 해주지 못해 무용지물에 가깝다. 역사책에 기록된 사실, 성인을 위해 공들여 집필한 문헌을 보더라도 정치적 의무에서의 바른 원칙을 일러 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역사는 사실이니까 배워야죠. 잼 있고요'. 이렇게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가치있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섬뜩한데다 무가치한 대상에 그럴듯한 가치를 심어주는 경우도 더러있다.
적용 가능한 실용성을 물어 사실의 가치를 검증하듯, 역사에 대한 가치도 그렇게 입증해야 마땅하다. 사학자들이 대량으로 귀중한 정보를 대량으로 공개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년이 채 안된다. 과거에는 왕이 전부였고, 백성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옛 역사를 묘사한 그림을 보면, 왕의 행적이 지면 대부분 차지했고, 백성의 삶은 배경으로 모호하게 처리되었다. 그러나 군주보다는 백성의 복리가 주된 관심사가 된 요즘에는 학자들이 사회 발전을 들러싼 현상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사회에 대한 역사가 지식의 욕구를 자극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민족이 스스로 태동하고 조직된 경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만한 것이라면, 뭐든 알고 싶어 한다. 정부에 대한 기록, 주요 인사에 대한 가십은 가급적 줄이고, 정부의 구조와 방침, 집행방식, 편견과 부패 등은 많을수록 좋을 것이다. 기록에는 중앙정부의 특색과 방책뿐 아니라, 지방정부및 당국 내 분과의 특색과 정책까지 포함되어야 한다. 사회풍습, 민중의 삶을 제어하는 관습, 산업시스템의 윤곽, 노사관계가 성립하게된 경위, 유통업체와 통신수단 그리고 과학은 얼마나 발전했으며, 주류를 이루는 사고방식은무엇인지 기술해야 할 것이다.
건축, 조소, 회화, 의류, 음악, 시, 소설에 나타난 미적 문화도 묘사해야 하고, 의식주와 오락 등 사람들의 일상을 개괄적으로 표현하는 것도 빠뜨려서는 안된다. 끝으로 사회 전체를 연결하려면, 이론과 실제를 아우르는 각계각층의 덕목도 필요하다. 이는 법률, 관습, 금언, 공적에 암시되어 있다. 이 모든 정보는 분명하고 정확한 만큼이나 매우 간결하며,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그룹지어 정리해야 한다. 사회현상이 다른 현상과 공존한다는 점을 체득케 하는 것이 필자의 목표다. 긱 세대의 신념, 관례, 제도가 변모하게 된 경위와 전세대의 구조와 기능에 대한 합의점이 후세의 합의점으로 발전하게 된 경위를 분명히 밝히려면, 차세대의 윤곽을 제대로 그려야 한다. 시민다운 행동을 규정하는 데에는 그런 정보만으로도 도움이 된다. 사학자들이 이행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임무는 민족의 삶을 들려줌으로써, 비교사회학의 소제를 제공하고, 사회 현상에 순응하는 궁극적인 방법을 차후에 결정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역사의 지식은 적절히 습득했다 하더라도 열쇠가 없다면 무용지물과 다를바 없다. 열쇠는 과학에서만 찾을 수 있다. 생물학과 심리학을 모른다면, 사회현상을 합리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 즉 사회는 사람을 둘러싼 간단한 사실 조차도 체득한 본성만큼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일반적인 생각, 감각, 행동을 체득하기 전에는 사회학의 진리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체력과 정신력을 겸비한 인간이 되지 못하면, 사회학을 폭넓게 이해할 수 없다. 사회는 개인으로 구성되며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개인의 행동이 결합된 것이다. 때문에 사회 현상의 해결방안은 개인의 행동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개인의 행동은 그들의 본성이 결정하기 때문에, 이를 이해해야만 개인의 행동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사회학을 해석하는 전문가는 생물학과 심리학을 반드시 섭렵해야 한다. 결론을 간단히 말하자면, 모든 사회현상은 생명현상인 동시에 가장 복잡다단한 생명의 단면이기도 하고, 궁극적으로는 생명의 원리에 좌우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사회현상을 파악하려면 생명의 원리부터 이해해야 할 것이다. 결국 우리는 과학을 통해 인간활동의 네번째 범주 사회활동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교육과정에서 공통적으로 전하는 지식에는 시민다운 품행을 지도하는데 도움될 만한 것이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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