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 지각, 그리고 감정에는 척력이 작용한다. 사색이 극단적으로 작용하면 감정이 죽고, 감정이 극단적 으로 작용하면 사색이 죽는다. 즉 상극으로 작용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과학적 사실이 시와 무관하다거나 과학탐구가 상상력을 발휘하고, 아름다움을 즐기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사사로운 일에는 정신을 팔면서도 위대한 자연에는 무관심한 사람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 없다. 자연이 만든 건축물에는 관심이 없지만,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의 음모론 같이 몰라도 그만인 논란에는 사족을 못쓴다. 길잡이 역할에서 최선을 찾는 우리는 암시적으로나마 훈육에 대한 최선도 찾아냈다. 행동을 규정하는데 활용할 수 있는 지식을 습득하려면 신체적, 정신적 능력을 강화하는데 적합한 지적훈련이 동반되어야 한다. 인간은 어디서든 역할에 맞게 고안된 인위적인 훈련이 아니라, 현장에서 자신의 본분을 감당함으로써 직능을 계발해 왔다.
아메리카 원주민은 민첩성과 순발력을 길러 훌륭한 사냥꾼이 되었다. 적과 야생동물을 추적하는 기술은 오랜 실습으로 다져진 것으로 인위적인 훈련보다 훨씬 뛰어나며 치밀했다. 우리는 생활 환경이 요구한 본분를 감당함으로써 최고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 지각에서 벌어지는 방대한 현상과 화석에서 이루어지는 훨씬 더 방대한 현상은 지질학 전공자가 수년간 연구해야 숙달할 수 있는 지식이 . 물리학의 주요분야인 소리, 열, 빛, 전기는 지식이 무궁무진한 탓에 이를 전부 배우려는 사람이라면 기겁할 것이다. 삶과 밀접한 과학은 숙지해야 할 것이 훨씬 많다. 과학자가 쌓아놓은 지식이 너무도 방대한 탓에 상하위 범주로 나누어야 이를 연구할 수 있다. 과학은 머릿속에 자리잡은 개념이 서로 연결 되었다가 대부분 필요한 사실에 대응된다. 과학은 인과 관계를 보여주므로 제대로 배우면 그것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인과관계는 우연성이 아니라 필요성에 근거하며, 필요성은 추리력을 훈련하는 계기가 된다. 언어가 비합리적인 관계에 가깝다면, 과학은 합리적인 관계에 가깝다. 언어교육은 기억을 훈련하는데 주안점을 두는 반면, 과학교육은 기억력과 이해력을 모두 훈련한다.
영국 왕립과학연구소에서 지식교육을 가르친 마이클 패러데이 교수는 가장 흔한 지성의 단점으로 판단력 부족을 꼽았다. 주변환경, 사건과 결과에 대한 정확한 판단은 주변현상의 인과관계를 파악할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어구의 의미를 훤히 꿰고 있다고 해서 인과관계를 정확히 유추해 낼 수는 없다. 학생은 맹목적으로 수용하게 마련이다. 주입식 교육에 따르는 것이다. 결국 학생은 정립된 지식이라면 무엇이든 의문을 갖지 않고 무조건 받아들일 것이다. 과학은 개인의 이성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또한 권위만 으로 지식이 수용되는 경우가 없으며, 모든 지식은 자유로운 검증절차를 거치게 된다. 귀납법을 가르친 존 틴들교수가 ‘인내와 근면도 그렇지만, 자연이 드러낸 사실에 대해서는 양심에 거리낌 없이 겸손하게 인정하는 것도 중요하다. 성공의 제1조건은 겸허히 포용하되 선입견이 진실과 대립된다 고 밝혀지면, 그것이 아무리 중요해도 기꺼이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칭찬을 늘어놓는 사람들은 작품의 외관을 보는데 만족할 뿐, 이를 열어보거나 이해할 생각이 전혀 없다면 찬사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인류는 시간을 투자해 가며 자연을 관찰하려는 사람은 할 일이 없다고 치부하기 일쑤다. 그들은 자연의 신비에 관심있는 사람을 비아냥댄다. 명실상부한 과학은 본질적으로 종교색을 띠게 되었다. 또한 만상의 근간을 이루는 보편적 법칙을 깊이 존중하고 은연중에 이를 믿는다는 의미에서 과학은 종교적이다. 법을 어겨도 뒷돈을 챙기거나 꼼수를 부릴 수 있다는 기존의 관행이 아니라, 정해진 구조안에는 상벌이 있으므로 불순종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치른다는 점을 깨달을 것이다. 만상의 영원한 원칙과 그에 순응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며, 과학도 자신 또한 본질적으로는 종교식을 띤다는 점을 입증한다. 인간이 알 수 있는 것뿐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보여 주기도 한다.
과학은 만상의 기원을 둘러싼 불가사의를 일깨워주며 독선적인 주장이 아니라, 인간이 건널수 없는 경계로 인도함으로써 이를 깨닫게 해줄 것이다. 인간의 지성은 자신을 초월한 대상과 맞닥뜨리면, 취약하기가 그지 없는데, 과학이 아니라면 그 어떤 것도 이를 일깨워 줄 수가 없다. 인간은 권위와 전통앞에서는 지성으로써 자부심을 느낄지도 모르나, 절대자가 숨은 불가사의의 베일앞에서는 겸손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진정한 자부심과 겸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훈육과 길잡이를 위해서는 과학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 필자의 결론이다. 사물의 의미를 배우는 것이 어구의 뜻을 익히는 것보다 낫고 지성이든, 도덕이나 종교적인 교육이든, 주변현상을 연구하는것이 문법과 어휘를 공부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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