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서를 따지자면 옷보다 장식이 먼저 세상에 나왔다는 말이 화두가 된 적이 있다. 오리노코강의 원주민은 몸이 좀 피곤하더라도 안료를 사기 위해 2주간 다리품을 판다고 한다. 그걸 손에 넣어야 사람 대접을 받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주민의 삶을 살펴보면 옷이 장신구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이처럼 옷감의 기능보다 근사한 디자인을, 착용감보다 마름질을 따지는 사람, 즉 옷의 기능보다는 모양새를 우선하는 이들을 통해 옷의 기원을 추리해 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있기 전에 고대 그리스에서 가르쳤던 음악, 시, 수사학, 철학은 실생활과 거의 관계가 없었음에도 주요 과목으로 자리를 잡았다. 일터에서 일하거나, 가족 또는 자신의 재산을 관리할 때 수년간 공부해 온 지식이 쓸모 없다는 말은 이제 두말하면 잔소리가 되어버렸다. 청소년에게 고전을 가르치는 동기가 무억인지 묻는다면 비슷한 답을 얻을 것이다. 유행이라는 미명아래 제 몸에 걸쳤던 옷을 자녀에게도 입히는 격이다.
오리노코강 원주민은 집을 나오기 전에 체면을 지키기 위해 안료를 바른다. 이들이 당장의 유익보다는 수모를 당하지 않기 위해 그러하듯, 우리 역시 근본적이 가치가 아니라 모르면 손가락질 당하기 때문에 사내아이에게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가르쳐야 한다고 느낀다. 지적인 면에서도 최근 들어 겉만 꾸미는 데 혈안이다. 여성도 마찬가지다. 귀고리, 반지, 팔찌, 머리 악세사리, 화장품과 세련된 옷을 위해 아낌없는 노력을 한다. 유행에 따르기 위해서라면, 몸이 아주 불편해도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근성은, 사회의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가 기능과 편의성에 대한 필요를 앞질렀다는 점을 강력히 시사한다. 교육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보여주기식 성과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교육계에서도 실용적 가치가 보여주기보다 못하다는 증거이다. 왕의 탄생, 서거, 혼인을 비롯하여 자질구레한 역사를 머릿속에 집어넣는 까닭도 지식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아니라, 사회가 역사를 품격있는 교육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과목중에는 실생활의 편리함보다는 남의 평가를 의식한 과목도 더러 있을 것이다. 먼 과거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욕구를 개인의 욕구의 하위에 두고, 주된 사회적 욕구가 개인의 욕구를 좌지우지해 왔다는 데서 이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공인된 정부가 없다면,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는 비공인 정치세력이 있기 마련이다. 이들은 너도 나도 왕이나 왕비 혹은 고위직에 오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윗사람의 비위를 맞추고 누군가를 짓밟으면서까지 추앙받고자 하는 몸부림은 보편적인 현상으로 삶의 에너지가 대부분 여기에 투입되고 있다. 사냥에 출전하기 전 얼굴에 무시무시해 보이는 안료를 칠하고, 허리춤에 적의 머리가죽을 찬 채로 부족에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 야만인 족장 뿐이라고 치부하면 곤란하다. 아울러 절세미인만이 '정복'을 위해 화장에 공을 들이고 격식을 갖추며, 오만가지 기예를 선보이리라 단정해서도 안 될 것이다. 학자, 역사가, 철학자 또한 그런 목적으로 지식을 사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본디 사람은 개성을 묵묵히 발휘하는데 만족할 줄 모르는 탓에 상대에게 이를 과시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남의 개성을 업신여기기 일쑤다. 사람들은 현실적인 가치가 있는 지식이 아니라 환호와 명예와 존경을 받거나, 사회적 지위와 영향력을 보장받거나, 혹은 대중의 눈길을 끌만한데에 관심을 둔다. 본연의 자아가 아닌 남에게 비치는 자아가 중요하고, 교육에서는 지식의 내재적 가치보다는 외재적 영향력이 더 중시되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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