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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삶 (앙토냉 질베르 세르티

쉬는 요령

대부분의 휴식은 부차적인 생활양식이다. 공부는 의무이기 때문에 경계가 필요한데 그래야 공부에 모든 활력을 쏟을 수 있고, 공부를 지속할 수 있고, 일생에 걸쳐 볼 때 최대의 수확을 거둘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면서 얻는 기쁨이다. 건강과 마찬가지로 휴식은 하나의 의무다. 사유하는 힘은 활동과 아느 정도 비례한다. 더구나 우리는 감각의 세계에서 태어나고, 그 세계에서는 사소한 실천적 행위들이 모여서 우리가 적응해야 하는 생명의 그물을 이루기 때문에 힘들다.  쉬지 않고 계속 노력할 수는 없다.  에너지를 회복하기 위해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에 몸을 담가야 한다. 휴식을 거부하는 것은 암묵적으로 노력을 거부하는 셈이다. 과로가 노력을 저해한다. 정신활동이 중단될 신체의 안쪽에서는 빈틈없는 회복 과정이 시작된다.  우리가 여가라 부르는 것은 실은 에너지의 전환 과정이다.

 

지성인이 하는 모든 일에 체력을 소진하는 집중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지성인의 과업 가운데는 사전 작업과 부수적인 작업, 사유와 저술에 수반되는 활동도 있다. 책을 고르는 일 , 문서를 정리하는 일, 메모를 모으는 일, 원고를 분류하는 일, 여백에 삽입지를 붙이는일, 논거를 바로 잡는 일, 공부와 책을 정돈하는 일 등은 모두 집중력이 필요한 일이지만, 그 자체로 공부는 아니다. 우리가 휴식을 위한 공간을 남겨두지 않으면, 휴식 스스로 그 공간을 차지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예견하지 못한 때에 휴식은 주의 산만, 졸음,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불가피한 일의 형태로 드러난다. 아퀴나스는 정신의 진정한 휴식은 기쁨이자 즐거움을 느끼는 어떤 활동이라고 말한다. 놀이, 허물 없는 대화, 교우관계, 가정생활, 즐거운 독서, 자연과의 교감, 이해하기 쉬운 예술감상, 힘들지 않은 육체 노동, 마을산책, 너무 엄격하거나 자극적이지 않은 연극관람, 적절한 운동, 이 모두가 휴식하는 방법이다.

 

자연의 품에서 공부할 수 있다면, 창밖으로 맑은 풍경이 내다보인다면, 그래서 지칠때 초록빛 전원에서 얼마간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즐겁겠는가!  혹은 사유가 막혔을 때 고통스럽게 우울한 기분을 감내하는 대신 산에서, 나무와 구름에서 지나가는 동물에서 착상을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럴 수만 있다면 공부의 결실을 두배로 맺을 수 있을뿐 아니라, 그 결실이 훨씬 더 매력적이고 인간적일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는 인간본성의 현실안에서 머무르라고 말한다. 적당한 여가를 챙기고 체력을 소진하지 말고, 평온한 상태에서 정신적 기쁨을 느끼며 공부하고 자유롭게 지내라. 공부와 평온한 기쁨의 이런 순환이 훨씬 더 필요한 이유는 공부하는 이에게 많은 시련이 닥치기 때문이다. 스스로에 대한 불만, 둔한 영감, 주변의 무관심, 시기, 오해, 빈정대는 말, 바당한 행위, 지도자의 방치, 친구의 배신, 이 모든 일이 시련의 일부이며 차례로 닥치기 마련이다.  공부의 고통과 공부하는 이의 고통을 치유하는 것은 공부다. 공부는 인생의 고뇌와 신체의 유약함을 완화하는 높은 곳으로 우리를 끌어올린다.

 

공부할 때 갑작스레 찾아오는 불안과 침울함에 맞서 어떤 치료제를 써야 하느냐고 자문해 보면, 답은 오직 하나 공부다. 공부하다가 낙담했을 때 용기를 얻기위해 어디에서 자극제를 발견할 수 있을까?  공부다. 나의 노력에 적대적인 사람과 나의 성공을 질시하는 사람들에 저항할 방법은 무엇일까?  공부다. 공부는 치료제이자 위안이다. 공부는 모든 시련을 이겨내게 해준다. 공부에서 생겨나는 승리감은 그런 우울감과 싸운다. 규칙적인 리듬에 따라 공부에 힘을 쏟으면, 노를 저으면서 노래하는 뱃사공의 기백같은 것이 생겨나 우울한 기분을 떨쳐내고, 자신을 다잡을 수 있다. 진리를 발견하는 것은 보상이며, 진리를 표명하는 것은 반박당하던 날들에 대한 고결한 복수이다.  비판 받을 때 무엇으로 적절히 응수해야 할까? 에머슨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비난과 관련해 지금 내가 아는 답은 하나, 다시 나의 공부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신의 저술을 변호하거나, 그 가치를 확고히 다지려는 것은 유치한 시도다. 가치는 스스로 변호한다. 침묵하고, 신 앞에서 겸손하고, 당신의 판단을 의심하고, 잘못을 바로 잡아라. 그런 뒤에는 세찬 파도에 부딪히는 바위처럼 꼼짝하지 말고 있어라.  글 한편을 변호하느라, 시간과 힘을 쏟을 바에야 다른 글을 쓰는 편이 나을 것이다. 비판은 당신을 공정하게 심판할 신에게 맡겨두라. 그런 뒤에는 귀를 닫아라. ‘사람들은 듣지 않는 이 앞에 서는 악하게 말하지 않는다’라고 아퀴나서는 썼다.  시기는 영광, 탁월함, 공부라는 수입에 부과되는 세금이다. 공부는 공부하는 이에게 대가를 요구한다. 공부하는 이는 불평하지 말고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지성인들도 서로 치사한 짓을 자주 저지르고, 때로는 극악한 짓까지 저지른다. 그러나 설령 지성인들이 공공연히 인정하지 않더라도 암묵적인 등급분류에 따라 진짜 가치는 매겨지기 마련이다.

 

공부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지 않은가? 공부를 경시하는 것과 공부의 아름다움을 지독한 이기주의의 추함으로 대체하는 것은 우리시대의 죄악 가운데 하나이다. 공부하는 것은 열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부 자체를 위해서 이다.  공부하다가 이렇다할 결실을 맺지 못하더라도, 씨를 뿌렸으나 수확하지 못하더라도, 수영하다가 파도에 떠밀려 계속 해변으로 되돌아오더라도, 걸어가다가 무한한 지평선 외에 아무것도 보지 못하더라도, 아무 문제없다. 믿고 소망하는 사람은 이런 일들로 실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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