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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삶 (앙토냉 질베르 세르티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정신이 사용하지 않는 재료는 정신을 방해하고 마비시킨다. 박식한 체하지만 정신은 비뚤어지고, 무기력한 흔히 살아있는 도서관이나, 걸어다니는 사전이라 불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 증거다.  우리는 기억하려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살려고 기억을 이용하는 것이다. 계획을 구상하거나 실행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 영혼이 흡수할 수 있는 것, 목표에 기여하는 것, 영감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 공부를 뒷받침하는 것은 무엇이든 정신에 새겨라 나머지는 망각하게 놔두어라. 쓸모없어 보이는 많은 것들이 간혹 유용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만에 하나 필요할지 모르니 기억하자고 말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필요하다면 다시 찾을 것이고 종이에 쉽게 기록해 둘 수 있을 것이다.

 

공부하는 삶의 전반적인 흐름에 기억을 포함시키는 것, 소명에 기억을 통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전공공부의 대상은 고도의 집중력으로 기억해야 하고, 부차적인 문제들은 넓은 시야들로 두루 기억해야 한다. 모두가 알아야 하는 것, 특히 지성인이라면 몰라서는 안되는 것들이 있다. 또 전공주제와 어느 정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각자가 정신의 넓고 좁음에 따라 기억해야 한다고 느끼는 정도가 다른 것들이 있다. 공부의 토대가 되는 것은 잠시도 지체하지말고 습득해야 한다. 그리고 기억해서 우리 마음에 고정시킨 것이 우리에게 더 효과가 있다. 어떤 질서로 기억할 것인가?  학문이란 원인에 대한 앎이다.  모든 경험의 가치는 다른 경험들과 어떻게 연결되고 어떻게 묶이느냐, 그리고 가치의 위계에서 어디에 놓이느냐에 달려있다. 언제나 무엇이 이것과 저것을 연결하는지 이것과 저것을 위해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 살펴라. 조각난 파편들이 아니라 조화로운 관계를 기억하라. 기억할 때도 모든 것을 본질적인 것과 연결하라. 수많은 자료가 근본적인 관념과 모두 똑같은 관계를 맺는다면, 자료 하나일 뿐이다.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관념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관념을 붙들어라.  그 관념이 매 순간 스스로 성장하고, 팽창할 수 있게 하라. 우리의 사유가 질서정연 하게 연속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쓸모 없는 짐에서 벗어나 질서가 제대로 잡힌 정신은 모든 힘을 공부에 쏟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정신 목표를 향해 곧장 나아갈 것이고, 사소한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주제에나 전체를 지배하면서 모든 대상의 열쇠가 되는, 나아가 삶까지 지배하는 몇가지 관념이 있다. 어떤 길을 가든 본질적인 것을 확실히 파악하면 전망이 열리고, 새로운 자료를 획득함에 따라 이미 습득한 것은 논리적으로 성장한다. 기존 사유는 새로운 사유의 출발점이 된다. 생명체가 발생하고 번성하기 위한 유일한 조건이 환경에 대한 적응인 것과 같다.  앎의 환경은 우주다.  그리고 우주는 그 자체로 유기적 조직이자 구조다. 공부하는 이가 전진하기 위해서는, 기억을 도움을 받아 우주에 상응하는 구조를 자신안에 세움으로써 환경에 적응하고 활동할 수 있어야 한다. 기억을 어떻게 습득해서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아퀴나스는 네가지 규칙을 제시했다. 첫째 기억하려는 것을 정돈하라.  둘째 기억하려는 것에 깊이 몰두하라. 셋째 기억하려는 것을 자주 생각하라. 넷째 기억한 것을 회상할 때는 나머지를 떠올리게 해줄 기억사슬의 한쪽끝을 잡아라. 아퀴나스는 자적인 것을 감각적인 것과 연결하면 기억에 이롭다고 덧붙인다. 감각적인 것은 지성의 적절한 탐구대상이고 자체로 기억되는 반면 다른 것들은 우연히 간접적으로 기억되기 때문이라고 아퀴나서는 말한다.

 

기억하길 원한다면 대상들의 연계와 근거를 이해해라. 대상들을 분석하고 존재이유를 찾고, 대상들의 계통과 연쇄의 순서, 그에 따른 결과를 관찰하라.  한 대상을 충분히 이해한 다음, 조각이나 느슨한 고리가 아닌 연계를 배워 정신에 집어넣는 것이야말로 전체를 끈끈하고 단단하게 만드는 방법이다우리가 더 깊이 열중할수록 더 깊이 새겨질 것이다. 소리를 지르듯이 들은 것을 되뇌고, 음절 하나하나를 똑똑히 발음하라. 무언가를 기억에 고정시키길 원한다면, 그것을 읽거나 듣자마자 정확하게 반복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어라. 그것이 책이라면 내용을 요약하고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있을 때까지 주의를 돌리지 마라. 모든 지적기능과 마찬가지로 기억을 유익하게 활용하는 데는, 마음을 들떠게 하는 정념이 없는 평온한 삶이 필수다. 자연과 삶을 마주하고 감탄하는 활기찬 정신 또한 기억에 기여한다. 지성인은 새롭고 신선한 것에 대한 감각을 길러야 한다. 그 감각은 풍성한 결실을 맺을 창작이나 탐구를 활기차게 수행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기억과 관련해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기억하느냐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억의 질이고, 그 다음이 기억의 질서이며, 마지막이 기억을 활용하는 기술이다. 사유할 재료가 모자란 경우는 거의 없다. 부족한 것은 재료를 다룰 사유다.  배움에 있어 지적인 흡수, 질서 정연한 연결, 풍요롭고 질서가 잘 잡힌 정신의 점진적인 통합은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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