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戒 老 錄 소노 아야코

늙어가는 과정을 자연스레 받아들인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죽는 것은 한번 뿐인 것이다. 이 말은 대부분의 경우 병이 낫는다는 것이다그렇게 생각한다면 고쳐야 하고 또 사실 나을 수 있다. 몸이 나빠지면 무엇보다 우선 고치지 않으면 안된다불가능하더라도 끝까지 희망을 가지는 것이 좋다. 그것이 인간의 의무인 것이다. 고쳐지지 않아도 고치려하는 그 과정이 중요하다. 돌이켜보면 우리들 모두는 이러한 과정을 살아온 것이 아닐까? 여러가지 많은 꿈이 있었지만 지나고 보면 별로 생각대로 된 것은 없다. 그러나 그 과정이 우리 인생 그 자체이다. 50세 때 70세의 계획을 세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지 모르나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80세가 넘으면 통증이 심할 때 이외는 의사진단을 받지 않을 작정이다. 옛날에는 평균수명이 70세였으니까, 나는 70세가 넘으면 의사의 치료를 받지 않을 생각이었다. 평균수명에 이르러 병을 발견했을 때 그 병과 몇 년 동안 싸워가며 살아가는 것보다 병을 모른채 주어진 수명을 다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50세를 경계로 상당히 건강한 사람이 여기저기 몸에 이상이 생기는걸 보면  50세란 육체적으로 본기점이 아닐까 생각된다. 50년 이상 육체를 쓰는 경우 몸이 녹슬어 버리지 않도록 끊임없이 주의하지 않으면 안되지만 그런 노력이 귀찮게 느껴진다. 어디서 인생을 마칠 것인가는 자신의 기호에 따른다. 또 그 사람의 정신과 육체의 강인함에도 좌우된다. 의학도 오래 살게만 한다는 것에 만족하게 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살아있어도 더 이상 인간이지 않는 삶은 무의미하다노인의 세가지 적 - 유동식, 점적, 휠체어-를 거부하는 것에는 본인의 의지, 기력이 필요하다. (점적: 관을 통해서 음식물이나 영양분을 제공하는 것)

 

인간은 자연이 스스로 자신의 몸을 조절해서 살아가도록 작용하는 일종의 기능이 있다. 최후는 자연에 맡기는 것이 좋다나이가 들면 유동식으로 한다든지 부드러운 것을 먹게 하면 좋다는 것들은 잘못된 것 같다. 음식의 맛은 단단함과 연함에 있다나도 이가 좋으니까 언제까지나 될 수 있는 대로 된밥을 먹고 싶다. 휠체어가 간호에 극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애물단지다휠체어에 앉으면 사고를 일으키지 않으므로 간호하는 사람은 편하다. 그러나 앉은 사람은 결과적으로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인간은 가능한 한 혼자 힘으로 서서 걸어가 용변을 봐야 한다. 그러는데는 시간도 걸리게 되며 간병인은 답답해서 휠체어를 갖고 오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것을 뿌리치고라도 반드시 걷지 않으면 안된다노인 당사자도 편하게 해주는 것을 좋아한다. 노인을 걷게 하는 것은 간병인에게 친절한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휠체어를 태워주면 좋으련만" 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해도 되겠지만, 이를 악물고라도 걸으려 하는 사람은 분명하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전달해야 할 것이다. 유언장을 써 보는 것도 좋다. 유언장을 쓴다고 금방 죽는 것도 아니다. 오래 살면 다시 고쳐 써도 된다. 편안하게 언제든 쓸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개인으로부터 혹은 사회로부터 좋은 면에서든 나쁜 면에서든 늘 터무니 없는 취급을 받는다. 수억의 인간이 지금까지 그런 현실을 얄궂은 운명을 받아들였다. 왜 자신만이 유독 그것을 거역하고 이치를 꿰어 맞추려 하는 것일까? 거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용서다. 용서라고 하면 반사적으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사람을 위해서 나는 하나의 문구를 인용하고 싶다. 용서란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다. 적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은 유토피아적인 몽상가의 충고와는 대단한 차이가 있다. 우리들이 살아남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절대로 지키지 않으면 안되는 운명인 것이다. 용서의 문제는 도덕도 아니고 신앙도 아닌 현실적인 수단으로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적의 손에 의해 쓰러진 흑인지도자 마틴 루터 킹의 말이다.

 

경제적으로도 별로 어렵지 않고, 사회적으로도 괜찮은 직장에서 관리 직종의 일을 해 왔던 사람이 자살을 했다. 그 이유는 아내를 먼저 떠나 보내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를 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죽은 것이다목적을 잃어버리면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혹은 집착이 아주 강한 나머지 그것을 잃은 데 대한 공포도 커지고 그 두려움 때문에 죽고 싶어지는 것은 언뜻 보면 모순 같지만 심리학적으로는 하나의 패턴으로 해명되고 있다노인의 자살은 어디 좀 당해보라고 빗대는듯한 자살 요소를 품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것도 그 빗대는 대상이 아무것도 해주지 않은 타인에 대해서가 아니라 여태껏 보살펴준 가까운 사람에 대해서 하는 것이다. 싸움이라면 얼마든지 해도 좋다. 그것은 나중에 대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그러나 죽음은 영원히 더 이상 너와 상대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아무리 괘씸한 대우를 받았다 하더라도 죽음으로써 보복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의 괘씸한 소행은 없다. 속마음은 그렇지 않다고 해도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자살은 자신에게도 주위 사람에게도 죄짓는 일이다. 기다리고 있으면 누구나 죽게 되어 있다. 누가 이런 늙음의 모습을 만들었을까? 그것은 당신도 아니고 나도 아니다. 눈은 둘, 코는 하나로 만들어져 있듯이 이유도 없이 늙는다는 것도 어떤 하나의 모습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자연스레 주어진 늙음의 모습에 하등의 저항할 필요가 없다나는 가끔씩 실제로, 그 나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젊게 보이는 사람을 만난다. 젊음을 유지하는 것은 그렇게 하고 싶다고 그렇게 되는 것보다 어떤 생활에 전념하고 있는 사람이 우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닐까?

 

'戒 老 錄 소노 아야코'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복한 일생도, 불행한 일생도 일장춘몽  (0) 2009.09.30
보살펴 주는 사람에게 감사할 것, 죽음  (0) 2009.09.30
처신  (0) 2009.09.24
운동  (0) 2009.09.24
마음가짐  (0) 2009.0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