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 탐구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자신의 전문탐구를 같은 갈래에 속하는 학문전체와 접목함으로써 탐구범위를 넓히고, 그 일군의 학문을 일반적인 철학, 신학과 연결하는 것이다. 어떤 학문도 혼자서는 앞길을 밝게 비출 수 없다. 고립된 학문은 점점 좁아지고 움츠러들고 시들고 시도때도 없이 엇나가기 마련이다. 한쪽으로 치우친 교양은 늘 빈약하고, 위태롭다. 어떤 갈래의 학문이든 다른 학문으로, 예컨대 과학에서 시로, 시와 과학에서 윤리학으로, 윤리학에서 정치학으로, 더 나아가 종교학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조금도 모순없이 단언할 수 있다. 수학을 빼고 물리학이나 화학을 탐구하는 것, 수학과 지질학을 빼고 천문학을, 심리학을 빼고 윤리학을, 자연과학을 빼고 심리학을, 역사를 빼고 무엇이든 탐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학문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한 주제는 다른 주제를 밝혀준다. 전문가이기 이전에 인간이 되지 못한 사람은 펜 가지고 장난치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소명에 따라 인류에 봉사할 운명인 지성인이라면 무엇보다 인간으로서 인류에 속하기를 바랄 것이다.
고귀한 노력을 기울이는 진정한 사상가라면, 다른 사상가들에게 무관심하지 않다. 일정한 지점까지는 다른 이들의 탐구를 따라가는 것이 당신의 의무이며, 그 의무를 다하면 당신 자신의 탐구를 수행할 때 열배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다른 영역들을 둘러보며 시야를 넓히고, 근원적인 연관성을 의식한 뒤 전문탐구로 돌아올 때, 당신은 좁은 학문에나 갇혀있던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당신은 반드시 한 정신에서 다른 정신으로 나아가면서, 한 정신으로 다른 정신을 바로잡아야 한다. 경작지를 망치지 않으려면 여러작물을 재배해야 한다. 이렇게 일정한 지점까지 비교탐구를 수행하는 것이 스스로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우고, 전공 공부에 착수할 시간을 늦추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정신을 넓혀감에 따라 당신은 더 쉽게 배우고, 더 쉽게 짐을 덜어낼 것이다. 열이 나면 물질이 팽창하듯 열의가 있으면 정신의 열량이 커진다. 피곤한 줄 모르고 즐겁게 지식을 흡수하며, 점차 역량을 키워갈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베이컨,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이프니츠, 괴테 같은 인물들의 사상은 한 분야로 한정할 수 없다.
시간을 분배하고 공부할 주제의 순서를 조정하라. 무엇을 공부하든 사소한 문제로 꾸물거리지 말고, 곧장 본질적인 것으로 나아가라. 내가 아직 말하지 않은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모든 문제에서 자신의 길을 발견할 수 없다. 지식의 어떤 갈래도 자급자족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 없이는 어떤 학문도 자급자족할 수도 없고, 신성한 학문인 신학에서 비롯되는 지혜없이는 인간의 지식 전체가 자급자족 할 수 없다. 철학이 본분을 다하지 못한다면, 학문은 낮은 수준으로 떨어지고 노력을 헛되이 낭비하게 된다. 정신의 질서는 반드시 사물들의 질서에 대응해야 한다. 또 정신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밝히지 않고는 진정으로 배울 수 없기 때문에, 정신의 질서는 반드시 원인들의 질서에 대응해야 한다. 이성을 사용하는 철학자로서,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빛을 사용하는 신학자로서, 진리를 추구하는 이는 출발점이자 원칙인 동시에 지고한 궁극적 목표인 것, 모든 사물과 모든 인간에게 전부인 것을 탐구의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어떤 대상이나 학문을 탐구하든 가장 높은 제1원리부터 그 중요성에 따라 위계가 정해지는 원리들이 원리와 우두머리로서 제역할을 다할 때에만 질서를 확립할 수 있다.
당신 자신의 글을 써라. 이것은 훌륭한 지적훈련이며, 당신의 정신에 유연성, 활력, 정확성, 다양성 그리고 궤변과 오류에 대한 반감을 더해줄 것이다. 또한 점차 개념의 저장고를 늘려 줄텐데, 그 개념들은 언제나 일관성있게 연결되면서 명확해지고 깊어질 것이고, 서로 맞춰가면서 견고한 통합체를 형성할 것이다. 나는 마땅히 토마스주의를 비교탐구를 위한 얼개를 제시하는 바이다. 전체의 얼개를 형성하고, 우리의 모든 지식을 자석처럼 끌어당기고 규율하는, 방향을 제시하는 일군의 관념을 가능한 한 일찍 갖는 것이 분명히 유용하다. 관념의 체계가 없다는 것이야말로 우리시대의 불행이다. 일군의 확실한 교리들로 뒷받침 되는 지적균형에 힘입어 그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것은 비할바 없는 이득이다.
학문이란 원인을 통해 탐구하는 지식이며, 원인은 뿌리처럼 깊숙이 내려간다. 우리는 늘 통찰을 위해 넓이를 희생해야 한다. 우선 넓이는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며, 통찰은 우리가 관찰한 사실의 핵심을 알려주고 우리가 끊임없이 발견하려 했던 실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는 앞에서 어느 정도 공부를 확장하는 것을 옹호했지만, 그것은 깊이를 위해서 그리고 정신을 형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옹호한 것이다. 기쁘게 공부하는 것, 적성에 맞는 길을 따라 비교적 편안한 마음으로 공부하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처음 에는 여러 길을 따라가면서 적성을 발견하고, 자신의 특별한 소명을 발견했다면,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가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하는 까닭은 어떤 한 가지를 해내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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