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위해 목표기준을 세우고, 그것에 도달하도록 외부에서 주어지는 방법들을 적용하는 기계론적 교육모델은 우리 사회의 발전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왜일까? 첫째 그것은 아이를 프로그램화 할 수 있는 존재이자 표준화 된 생산품, 요컨대 외부목표를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교육모델에 따라 목표 기준은 두가지 방법, 즉 평균 기준 혹은 사회가 매순간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것 들에 따른 사회적 기대감에 따라 정해진다. 첫번째로 또래 모든 아이들이 알고 행동하는 평균기준을 바탕으로 산출한 그래프안에서 아이가 나이에 알맞게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정해진 그래프에서 벗어났다고 판단되면 바로 위험신호가 울리고, 이를 고치려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 아이들은 갈수록 늘어나는 과외활동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교실에서 잠을 잔다. 또한 많은 아이들이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 학습을 반복하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두번째로 아이의 목표기준은 사회적 기대감에 따라 정해진다. 우리는 자녀들을 경제적 노동시장에 알맞은 아이로 만들고 싶어한다. 그래서 아이가 알맞은 기술도구를 갖추도록 준비시킨다. 어떤 직업을 얻기 위해 지금부터 아이들이 애를 쓴다해도 막상 아이들이 일터에 나가야할 시기가 되면 시장에서는 그 직업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예전에는 대학졸업장이 취업을 보장해 주었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사회는 재치있고 창조적이며, 환경적응 능력이 높은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아이들이 유치원때 부터 앞서 가야 한다고 생각하며 새로운 기술도구에 대해 교육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도구들은 분명 아이들이 노동시간에 합류하게 되는 시기가 되면, 혹은 그보다 훨씬 이전에 구시대의 유물이 될 것이다. 우리는 아이에게 도구 사용법을 가르치느라 시간과 소중한 자원들을 낭비하고 있다. 눈깜짝할 사이에 슈퍼차일드로 만들기 위한 경주에 뛰어들게 된다. 오늘날 우리 현실이 그렇다. 갈수록 많은 부모들이 선행학습을 위해 자녀들의 머릿속과 시간표에 학교활동과 과외활동을 꽉꽉 채워넣고 있고, 그 결과 평균곡선도 바뀌었다. 이전에는 여섯 살에 읽는 것을 배웠다면, 오늘날에는 두세살만 되어도 꼭 읽는 학습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지금이 바로 많은 교육시스템중 이런 방법에 문제를 제기해야만 하는 위기의 순간이다. 갈림길의 한쪽은 이런 문제를 단기간에 해결할 만한 또 다른 기계론적 교육모델을 찾는 것이다. 또 다른 쪽 길은 이런 교육시스템에 문제를 제기하고, 아이를 교육의 주인공으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매우 뛰어난 재능이 있다. 무언가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육의 주요기능이 되어야 한다. 교육은 우리의 타고난 재능을 계발하고, 세상에서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시스템이다. ( 켄 로빈슨 경)
요즘 아이들은 잔꾀를 부리고 고마워할 줄도 모르며, 누군가가 자신을 기쁘게 해주고 알아서 이끌고 가주길 바란다. 솔직히 '주입하다'는 경이감을 회복하는 과정을 찾아가는데 필요한 동사는 아닌 것 같다. 이 단어에는 외부에서 주체에게 행동을 가한다는 뜻이 분명하게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입하다' 라는 말은 누군가에게 생각과 개념, 또는 자신이 느끼고 선호하는 것과 확신하는 것에 대해 고집을 부리며 계속 부어넣는 것을 뜻한다. 현재 교육은 결론적으로 보면 밖에서 안으로 이다. 이것은 주체와 상관없는 외부행동을 암시하고 있다. 주입하기는 기계론적 방법으로 많은 사람이 환영할 만한 결과를 내지 못한다. 왜냐하면 주체가 주입받은 내용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주입은 아이를 없애고 당신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다. 반면 교육하다educar의 어원은 주입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라틴어 ex와 ducere가 결합된 말이다. 즉 안에 있는 것을 밖으로 끌어낸다는 뜻이다. 아이들을 고려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배움의 욕구는 밖이 아니라 안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교육하는 사람은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좋은 점들을 회복하도록 옆에서 함께 해주며, 아이 스스로 찾도록 기회를 주고 적절하지 않은 것들로 부터 아이의 시선을 보호해 준다. 여기서 받아들인다는 것은 아직 이해할만한 나이가 안된 아이들에게 어른들 세상의 복잡하고 곤란한 것들을 보내지 않고, 그런 모든 안좋은 의도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순수해서 나쁜생각이나 왜곡된 의도를 감당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맑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아이가 자기 삶의 주인공이고 저만의 기본욕구가 있다는 것, 그리고 아이들의 속도가 우리의 속도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또한 아이는 자기 안에서부터 배움을 시작하기 때문에, 외부 자극을 쏟아붓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반면 주입하기는 아이가 아닌 어른의 기준에 따라 실행하고, 아이가 우리의 기준대로 따라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가 받아들일 준비도 안되었는데 우리가 준다면, 우리가 주는 선물은 이해관계가얽혀있는 부담스러운 요구가 된다. 너에게 이것을 해줄테니 대신 이걸하고, 내가 원하는 행동을 해야만 하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누군가 당신에게 '네가 잘하면 해줄게'라고 말한다면, 당신 또한 질색할 것이다. 아이는 분명 이렇게 대꾸했을 것이다. '날 좋아하는 거예요, 아니면 잘하는 내 모습을 더 좋아하는 거예요? 날 좋아한다면, 있는 그대로의 날 받아들여줘요. 그러고 나서 잘하는 내모습도 좋아해줘요. 날 잘 인도해주고 잘할 기회도 주면서요. 그리고 내 특성에 맞는 것이 내 주변에 있게 해주고, 맞지 않는 것에서 날 보호해줘요'. 도대체 목적과 수단을 헷갈리지 않으려면,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걸려야 하는 걸까? 교육의 목적은 아이 자체이지 아이와 함께 무언가를 얻기를 바라는 게 아니다. 주입하는 것은 방법이 아니다. 또한 오늘날 많은 수많은 법칙과 윤리강령에 집중해서 벌을 주거나 강요하는 것도 올바른 해결책은 아니다. 그렇게 하면 아이들에게 우리가 기대하는 바와는 정반대인 면역체가 바로 생성되기 때문이다. 또한 지속적인 보상도 올바른 방법은 아니다. 보상은 틀에 박힌 조건화된 행동을 만들어 내고, 아이들이 그것을 장려하는 사람들과 기관, 정부에 의존적이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자유를 추구하려 애쓰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서 지금처럼 유행에 휩쓸려 로봇처럼 원격조종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았던 적은 없었다. 안에서부터 생겨나는 동기가 없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다. 경이감이 우리 안에서 숨 막힌 채로 갇혀 있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대신할 것을 외부에서 찾느라 동분서주하게 될 것이다. 부모들은 아이들을 재우고, 먹이고, 바른행동을 하게 하기 위한 쉬운 방법을 여기저기서 찾고 있다. 자발적 노력이 결핍된 문화를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가 바꾸어야 하는 것은 어린이와 청소년이 아니라, 자녀들의 교육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점이다. 주입을 멈추고 아이들 안에서 최고의 것을 끄집어내야 한다. 경이감을 느끼는 아이로 교육하는 것은 아이 내면의 자유를 존중하고, 교육과정에서 아이의 힘을 믿으며 아이의 속도를 존중하고, 침묵과 자유로운 놀이를 즐기게 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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