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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에 대한 찬양 (버트런드 러셀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

우리는 창조의 주인이라는 말에 익숙해져 있다. 동굴에 살던 사람들처럼 사자나, 호랑이나, 맘모스나, 야생멧돼지들을 두려워할 이유도 없어졌다. 우리끼리 싸우지 않는 한 우리는 안전하다. 그러나 야수들이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지 못하게 된 반면, 작은 동물들에 관한 한 상황은 판이하다. 최고 위치를 차지하게 된 포유동물들은 덩치가 커져갔다. 지구상에서 가장 커진 맘모스는 멸종되었고 그밖에덩치 큰 동물들도 희귀해져갔다. 다만 인간과 인간이 길들인 동물들은 예외였다. 인간은 지능을 이용해 대규모 인구에 필요한 음식물을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이제 인간은 안전하다. 그러나 곤충과 미생물이라는 작은 생명체들로부터 안전하지 못하다. 곤충은 숫자에서 유리하다.

 

많은 유해곤충들이 인간에 의해 뜻하지 않게 새로운 지역으로 옮겨지면서 막대한 피해를 입히곤 한다. 여행과 무역은 미생물과 아니라 곤충들에게도 유용한 것이다.  과학은 곤충을 해충상태에서 제거하는 방법들을 발견해내고 있다. 프리츠 하버 교수는 질소를 고정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독일정부에서는 고성능폭발물 제조에 이용하고자 했고, 그가 폭탄이 아닌 비료를 선택하자 추방해버렸다. 또 한번 대전이 일어나면, 해충을 풀어놓을지 모른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전쟁이 끝난다고 해도 그 해충을 박멸하기란 불가능하다. 우리가 더 많이 알수록 서로에게 더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다. 만일 인간들이 서로에 대한 적개심으로 곤충과 미생물까지 동원한다면, 결국엔 곤충들이 유일한 승자로 남게될 가능성도 결코 없진않다. 우주의 입장에서 본다면야 아쉬울 것도 없겠지만, 인간인 나로서는 내 종족에 대해 한숨짓지 않을 수 없다.

 

서구문명 어느 곳에서나 교육기관은 두가지 윤리관에 의해 지배된다. 기독교의 윤리관과 국가주의의 윤리관이다. 내가 교육의 목적으로 대신하고 싶은 개념은 문명이다. 이때 내가 말하는 문명의 의미는 한편으론 개인적이고 한편으론 사회적이다. 개인적 차원의 문명은 지적인 자질과 도덕적인 자질로 이루어진다. 지적인 것으로는 최소한의 일반지식, 자기직업에 있어서의 전문기능, 증거에 근거해 소신을 배우는 습관들이다. 도적적인 것으로는 공평무사 하고, 친절하고, 자기조절이 어느정도 가능한 자질을 들수 있다. 여기에 한가지 더 보태고 싶은 것은 도덕적인 것도 지적인 것도 아닌, 심리적인 것에 가까운 요소이다. 바로 열정과 생의 환희이다. 사회 차원에서의 문명은 법의 존중, 인간과 인간사이의 정의, 인류에게 영속적으로 해를 주는 일에 관계하지 않는다. 소신, 목적에 맞는 수단을 택할 지적능력등을 요구한다. 거대한 인구가 제한된 공간에서 생존하려면 과학과 기술의 뒷받침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교육은 적어도 최소한의 필요한 과학과 기술들을 후세에 전해줄 수 있어야 한다. 최대의 자유를 허용하는 교육은 자비심과 자기조절, 훈련된 지성이 어느 정도 뒷받침 된 상태에서만 성공할 수 있으며, 이러한 요건들이 모든 충동을 그대로 방치해 두는데서 생겨나기란 힘들다.

 

사회적 견지에서 볼 때 교육은 단순한 성장의 기회가 아니라, 보다 적극적이어야 한다. 물론 교육이 그러한 기회도 제공해주어야 겠지만, 동시에 아이들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획득할 수 없는 정신적 도덕적 소양을 키워 주어야 한다. 복종하는 사람들은 사고와 행동에 있어 창의력을 상실한다. 또한 저지당하고 있다는 느낌에서 생겨난 분노는 보다 약한자들을 못살게 구는데서 탈출구를 찾기 쉽다. 과도하게 권위적인 교육은 학생들을 말과 행동에서는 창의성을 주장하지만, 나 이외는 용인하지도 못하는 소심한 압제자로 만들어 버린다. 교육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훨씬 더 심각하다. 공포를 불어넣고 즐거워 하며, 그 밖의 아무것도 고취시키지 못하는 데 만족해하는 사디스트적 규율주의가 되어 버리는 경향을 보인다. 반항적 태도도 필요한 측면이 있긴 하지만, 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없게 만든다. 바람직한 것도, 복종도, 반항도 아니며 선한 본성과 사람들 및 새로운 사상들에 대한 일반적인 호의이다. 이러한 자질들은 부분적으로 선천적인 기질에서도 기인하지만, 활기찬 충동들이 저지되었을 때 생겨나는 좌절된 무력감으로부터의 해방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아이들이 자신의 주변을 호의적으로 느끼려면 아이의 중요한 소망들에 어느 정도 공감해 주어야하고, 아이들은 단지 신의 영광이나 국가의 위대함 따위의 추상적인 목적에 이용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타인에 대한 배려는 큰 문제에서뿐 아니라 자그만 일상들의 차원에서도 문명의 기본요건이며, 그것없이 사회생활을 견뎌내기는 어렵다. 내가 생각하는 타인에 대한 배려란 필요한 일을 기꺼이 공정하게 분담하고자 하는 마음, 모든 것을 고려하여 불화를 없애는 방법들에 기꺼이 따르고자 하는 마음을 말한다. 아이들의 집단이 성인의 간섭을 전혀 받지 않고 방치될 경우, 거기엔 강자의 압제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인세계의 가장 심한 압제보다 훨씬 더 야만적이기 쉽다. 두세 살 짜리 아이들 둘이 함께 놀게 되면 두 아이는 몇 번 싸워본 다음, 결국 어느 쪽이 늘 승자가 되는가를 깨닫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나머지 아이는 늘 노예가 되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배려는 대부분의 아이들의 경우 저절로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권위를 발휘하지 않고는 가르치기 힘든 것이다. 이 점이야말로 성인들이 포기해선 안된다는 입장의 가장 중요한 근거일 것이다.

 

아이가 학교에 들어오기전 이미 부모들에 의해 올바른 해결이 불가능할 정도로 되어버린 경우들도 많다. 가정에서부터 분별있게 훈련된 아이들은 사소한 일에서 제지받는 것을 참아낼수 있다. 자기가 지금 도움을 받고 있는 중이라고 느낄수만 있다면 말이다. 당신이 조건없는 애정을 가지고 아이들을 대한다면, 아이들은 당신의 제안에 쉽게 반응할 것이고, 금지사항들도 쉽게 받아들일 것이다. 바람직한 관심이란 아무 목적없이 아이들과 같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거움을 느끼는데서 나온는 것이다이런자질을 가진 교사라면 아이들의 자유에 간섭할 필요도 별로 없겠지만, 혹시 필요한 경우가 있다해도 아이들에게 심리적 상처를 주지않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업무가 과중한 교사들로서는 아이들에 대한 본능적인 애정을 간직하고 있기란 대단히 어렵다. 아이들의 사회는 엄격한 규율이 부재한 경우엔 특히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그 어떤 이론으로 무장한 교사라 해도 시달리다 보면 피곤해지고, 결국엔 짜증이 나게 마련이고, 짜증스런 마음은 어떻게든 표출되기 쉽다. 자기조절만으론 필요한 호의를 늘 간직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호의가 존재하는 곳에는 말을 잘 듣지 않는 아이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두고 미리 규율부터 내세우는 일은 불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호의라는 충동이 자연스럽게 올바른 결정으로 이끌어 갈 것이고, 당신이 아이를 좋아한다는 것을 아이가 느낀다면, 어떤 결정이든 대체로 올바를 것이기 때문이다. 규율이란 제 아무리 현명한 것이라 해도 애정과 접촉을 대신할 수 없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