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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에 대한 찬양 (버트런드 러셀

우리 시대 청소년들의 냉소주의

대학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지식층 청년들이 과거에 비해 훨씬 더 냉소적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게 된다. 인도의 진지한 젊은이들은 기본적으로 영국은 사악하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이 전제로부터 자신의 철학세계를 연역해낸다. 영국이 기독교 나라라는 사실로부터 힌두교나 회교가 유일하게 진정한 종교라는 결론이 나온다. 영국인들이 물리력으로 인도를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도덕의 힘만이 존경받을 만한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서구의 젊은이들은 공부를 하면서 만사를 꿰뚫어 보며, 세상을 비추는 달 아래 놀라운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알아냈다고 굳게 확신하고 있다. 오늘날 서양의 젊은이들이 냉소주의만으로 대응하고 나온다면 이 상황에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음에 틀림없다. 젊은이들은 들은대로 믿으려 하지 않을뿐 아니라, 아무것도 믿으려 들지 않는다.

 

한때 애국심은 여러 곳에서 오래동안 열정적인 신조가 되어왔고, 최고의 지성들도 최대한 지지해 주었다. 지식층 청년들은 더이상 애국심을 시대에 적합한 이상으로 인정하려 않으려 한다. 전쟁중에 군국주의와 싸우고 있다고 외치던 사람들이 결국엔 각각 자기 나라의 주요 군국주의자들이 되었다진보는 필연적으로 생산된 자동차 대수나 소비된 땅콩갯수 같은 중요하지 않은 것들로 측정하게 된다. 정말로 중요한 것들은 측정할 수가 없다. 게다가 현대의 많은 발명품들은 사람을 멍청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현대 인간은 불행이 공격해오면, 스스로를 통계상 총계속의 한 단위로 의식한다. 사소한 패배들의 서글픈 행렬속에 과거와 미래가 그들의 앞에 펼쳐진다. 인간 자체가 무한한 침묵 중간 중간 짧은 막간을 이용해 고함치고 법석을 떨며 활보하는 우스꽝스런 동물로 보인다.

 

옛날에는 진리가 절대적이고, 영원하고, 초인간적인 것이었다. 나 자신도 젊을때는 진리를 찾느라 청춘을 허비했다. 심리학자들은 믿음이란 것이 합리적 동기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는 드물다고 말한다. 만연된 회의주의는 지적 원인보다는 사회적인 원인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그 주요 원인은 언제나 힘이 없는 것에 대한 위안이다. 힘을 가진 자들은 냉소적이지 않다. 압제의 희생자들도 냉소적이지 않다. 그들은 증오로 가득차 있으며 증오란 다른 열정들과 마찬가지로 부수적인 일련의 믿음들을 수반한다.  현대 지식들인은 선전가가 되거나, 법정의 어릿광대가 되어 어리석은 부자들에게 서비스를 팔 마음이 있다면야 좋은 일자리와 높은 수익을 확보하는 것이 결코 힘들지 않다.

 

지식인들이 볼 때 자신들에게 일을 지시하고, 대가를 주는 정부나 부자들의 목적이 해롭기까진 않다 하더라도, 불합리하게 보이는 경우가 많다.  과학을 하는 사람들은 서구에서 조차 냉소적이지 않다. 그들은 그 사회의 전폭적인 승인과 더불어 자신의 최대 기량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식인들중에서 예외적으로 운이 좋은 것이다.  좀더 나은 이상을 설교 하거나 젊은이들앞에서 제시하는 것만으로 현대의 냉소주의는 치유될 수 없다.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창조적인 충동을 구체화 하는 직업을 찾아낼수 있을 때만 치유가 가능하다. 인체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에겐 의료행위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기업가는 자신의 행위가 가져올 여러가지 영향들에 대해 전혀 몰라도 자유롭게 일할 수 있다.  대규모 조직의 증가로 현대의 인과관계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하고 원거리적이다. 그런데도 그러한 조직들을 통제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이 낳을 결과의 100분의1도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