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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있게 산다는 것( 알렉스 파타코스 지음

거리를 두고 자신을 바라보자.

일을하는 방식은 항상 일보다 더 중요하다. 일은 관계- 우리와 다른 사람들, 고객, 우리가 만드는 상품들, 서비스, 환경- 를 대표한다. 이러한 관계들은 개인과 공동을 위한 의미를 갖는다. 결과에 너무 초점을 맞추면 관계가 훼손된다. 성공하려고 애쓸수록 성공은 점점 손에 잡히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직관적이다. 우리는 주위 사람들의 기분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신뢰와 불신을 눈치챈다. 뭔가가 왠지 잘못된 것을 느낀다. 개인생활에서나 직장생활에서 부당하게 대우받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런 느낌들이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계기와 동기를 창조한다. 일을 하면서 사람들과 서로를 존중하고, 의미있는 순간을 가질 기회를 놓칠 때마다 장기적인 상공의 가능성은 줄어든다. 반면 시간을 내서 대인관계를 보살필 때 성공 가능성은 현저하게 높아진다. 매일 매일 순간 순간의 삶이 성공이 되고, 특별한 목표를 향해 다가가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비즈니스의 문제들과 개인적 문제점들이 종종 서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현명한 회사들은 관계를 창조하는 개인의 능력이야말로 가치를 움직이는 엔진임을 알고 있다.

 

우리가 서로의 동기를 믿는 것 또한 그 순간뿐 아니라 장기적인 성공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믿음이 없다면 다른 사람들에게서 피해나 입지 않을지 그들의 동기에 어떻게 대처를 해야할지를 계산하느라고 정신이 없을 것이다. 그 결과 일에서의 의미 추구는 어려워지고 가치를 움직이는 엔진은 삐걱거린다. 만일 관리자들이 우리가 하는 일이 중요한 의미가 있으며, 우리가 서로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존중한다면  발전이 가능해진다. 안그러면 불안해지고 우리 자신이나, 관리자나, 일이나 그 무엇을 위해서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과잉 의도가 끼어들면 의미가 비켜가게 된다. 의미를 비켜가면 관계가 손상된다. 관계가 손상되면 존중이 사라진다. 존중이 없으면 창의성과 생산성이 떨어진다.

 

우리가 처한 상황, 그 너머까지 바라보는 이런 경향은 분명 처음에 가치있는 목표를 수립할 수 있다. 하지만 그곳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의미가 앞서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도중에 우리 자신의 의미를 믿어야 한다. 상처없는 인생은 없다. 이혼하고 실직하고 때로는 오랜 세월 희생해야만 하고 건강이 나빠지고 아이들에 실망하고 서로를 실망시킨다. 인생은 성공만큼이나 실패로 점철될 수 있다. 하지만 실패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으며 오로지 의미 속에서 실패는 유용한 유산이 된다. 그럴 때 실직이나 불화에 대해 실망하고 원망하는 대신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동정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의미는 순간의 감사 의식, 그리고 관계 속에 있다. 만일 오로지 미래에 초점을 맞춘다면 현재와의 모든 연결을 잃어버리게 된다. 현재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 과정을 이해할 수 없다. 지금 사람의 의미에 대해 감사하지 않으면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지 않게 된다. 직업적으로 성공했다 해도, 그 성공과 함께 오는 감정들은 순간적일 뿐이다. 목표에 도달하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지? 갑자기 허탈하고, 공허한 느낌이 들고, 그 모든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의아해진다. 이것이 전부인가?  만일 우리가 목적을 위해 수단을 돌보지 않는다면 그 끝은 정말 끝이 된다.

 

뭔가에 몰두하는 것은 사람에 당면한 목표를 주지만 그 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더 많은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결과에 관계없이 보다 큰 보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가 과정을 소중히 한다면 끝은 새로운 시작이 된다. 일을 하면서 주변 사람들과 그 과정에 충실할 때 결과에 상관없이 무한한 성취감을 경험하게 된다. 일을 하면서 개인적 가치에 충실하면 의미의 기초가 수립된다. 순간을 의식하고 일을 하면 의미와 연결된다. 우리의 존재 그리고 모든 생명의 존재는 의미다. 우리가 어디서 일하건 건설현장, 제과점, 학교, 기업, 식당, 집 .... 의미는 발견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생각의 포로가 되지 않고 자신을 방해하지 않으면 일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가 돈을 버는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삶 자체가 의미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실업과 힘든 시련속에서 당당하게 반응하는 능력과 의지를 보여줄 수 있다. 자기자신으로 부터 거리를 두고 볼 수 있으면 어려움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곤경에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행동을 취할 수 있다. 일은 의미의 일부이며 우리 자신, 가족, 사회, 세상을 부양하고자 하는 의도를 보여준다. 일은 우리 자신이 아니다. 일은 우리가 하는 어떤 것이고 그것은 하는 방식이다.

 

유머는 위대한 선물이다. 그리고 일에 유머를 가져가는 것도 역시 선물이다. 유머 감각은 쾌활함과 함께 한다. 쾌활한 사람은 대부분 지독한 시련을 겪었다. 비극이 닥치면 깊은 슬픔에 빠지지만 슬픔을 극복한 후에는 쾌활해진다. 진정한 쾌활함은 가식적이지 않다. 그것은 세상의 무게나 날씨와 상관없이 현재를 경험하는 한가지 방식이다. 쾌활함은 우리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준다. 실제로 적절한 유머는 그 무엇보다 빨리 우리 스스로 자초한 불행한 기분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자신의 처지에 거리를 두고 볼 때 문제를 넘어설 수 있다.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극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속속들이 알지 못한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희로애락이 있다는 것은 안다.어떤 동료들은 집에 가면 혼자가 되고 어떤 동료들은 행복한 가정생활을 한다. 모두들 삶이 제공하는 기쁨과 슬픔을 경험한다. 근근이 생활하거나 십대 아이들이 있거나 아이들이 어리거나 아이가 없거나 나이든 부모를 모시거나 자동차 할부금과 의료비나 일상의 모든 요구들에 시달린다. 전 세계사람들은 생활을 꾸려가면서 일을 하러간다. 그들은 당면한 일에 초점을 맞추면서 동시에 생활을 꾸려가야 한다.

 

자기이탈은 구급요원들이 환자들로부터 감정적인 거리를 유지해서 긴급한 상황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과 일을 바라봄으로써, 순간의 긴장을 극복하고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실수에 대해 초연할 수 있는 것은 일에서 매우 유익한 기술의 하나다. 아무도 실수를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웃을수 있다면, 주변사람들을 편하게 해줄 수 있다. 실수는 누구나 한다. 실수는 삶과 함께한다. 실수는 인지상정이다. 누군가가 실수를 했다고

인정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를 해준다. 실수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자기이탈이 필요하다. 우리는 실수를 곱씹으면서 지나치게 연연한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웃음으로 넘길 때 주변사람에게도 안심을 시킬수 있다. 자기이탈과 부정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이탈은 의도적이고 행동 지향적이다. 상황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는 방식으로 행동한다.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반면에 부정은 경험과 경험이 주는 장점에서 우리를 분리시킨다. 우리 자신의 경험을 부정하면, 다른 사람의 경험도 부정하게 된다. 부정은 연결을 끊어 놓는다. 반면 자기이탈은 연결과 학습과 성장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