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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있게 산다는 것( 알렉스 파타코스 지음

우리에겐 삶의 자세를 선택할 자유가 있다

사람에게 모든 것을 앗아가도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 자신의 길을 선택하는 자유는 앗아갈 수 없다. (빅터 E. 프랭클)

 

재난을 당하면 자기연민에 빠져서 주위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려면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야 한다. 불행이나 집착에서 벗어나는 길은 우리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십대의 아이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아니면 다른 주변사람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좀 더 관심을 갖는 것이다. 이것은 쉽지 않는 일이며 종종 억지로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옴짝달싹 못하는 곤경에서 빠져 나오는 길입니다. (크리스토퍼 리브)

 

우리 스스로 문제의 일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해결책의 일부가 될 수 있을 때만 일에 임하는 태도를 선택하는 자유를 행사할 수 있다. 개인적인 사람에서도 마찬가지다. 해결책이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은 소용없다. 우리 스스로 해결책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내가 이 자리에서 지금 죽을 가능성이 100% 확실하지 않는 한, 그리고 이 수용소에서 나가는 날까지 살아남지 못할 가능성이 100%가 아닌 한, 나는 지금부터 일말의 생존 가능성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어떤 수용소에 보내지더라도 나를 둘러싸고 있는 커다란 위험을 무시하고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 이것은 일종의 방어기제가 아니라 당신에 선택한 대처 자세다.(빅터 E. 프랭클)

 

나는 일을 하면서 오래된 자폐습관을 가진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은 주어진 일이나 형편에서 보다 나은 미래를 시각화하지 못하고 부정적 사고에 갇혀 있다. 또한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커서 옴짝 달싹하지 못하고 모험을 피한다. 사람은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이나 끝나지 않은 일에 대한 책임감을 인식하게 되면, 삶을 함부로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알고 어떤 곤경도 견딜 수 있을 것이다.( 빅터 E. 프랭클)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가 어떤 이유로 좌절되었기 때문에 쾌락이나 권력으로 대신한다. 프랭클은 오로지 의미 추구만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과 삶에서 필요로하는 진정한 풍요와 보람을 줄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권력이 경기장에서 뛰고 있을 때 항상 또 다른 권력이 옆에서 대기하고 있다. 권력은 피곤한 게임이고 쾌락과 마찬가지로 덧없고, 항상 예기치 못한 힘들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는 내부로부터 온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하찮거나 아무리 큰 힘과 권력이 방해 해도 의미는 우리를 지탱해 준다. 무엇보다 의미는 우리가 견뎌야 하는 어떤 고통과 괴로움도 견딜 수 있게 해준다.

 

우리 문화에는 일을 놀이와 구분해서 생각하는 오래된 전통이 있다. 우리는 일에 경계선을 긋는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일의 스트레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회사를 경영을 하건 택시운전을 하건 음식을 요리하건 청소를 하건, 모든 일이 의미를 반영한다. 불교사원에서 요리나 청소를 맡은 수도승들은 몸소 자질구레한 일들을 처리하는 것을 수행으로 삼았다. 그들의 정성은 의미를 창조하며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에서 배운다. 프랭클이 '의사와 영혼'이라는 책에서 우리의 삶을 아름다운 산맥에 비유한 수행법은 당신이 하는 일을 마치 저 멀리 있는 산맥처럼 바라보는 것이다. 당신은 그 산맥의 봉우리 위에 누구를 올려 놓겠는가? 다시말해 당신의 경력과 직장생활에 중요한 영향을 준 사람은 누구인가? 그들 중에는 작가, 교사, 고용주, 리더, 당신이 사랑했거나 존경했던 사람들이 있다. 산맥 그리고 산 봉우리마다 그들의 이름을 적어보자. 그리고 생각나는 가치를 찾아보자. 어떤 가치가 가장 긍정적이고 의미 있는가? 지금까지 경력이나 일을 하면서 가장 충실하게 지켜온 가치들은 어떤 것인가? 그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생존을 위한 투쟁이 해결되고 나면 무엇을 위한 생존인가하는 문제가 등장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삶의 수단을 갖고 있지만, 삶의 의미는 갖고 있지 않다.( 빅터 E. 프랭클)

 

 

현대는 우울하지만 물질적으로 풍요롭다. 프랭클은 인류의 생존을 위한 투쟁이 해결되고 나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위한 투쟁인가?' 라는 질문이 등장한다고 보았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부유해졌지만 '무엇을 위해 사는가?' 라는 질문과 씨름하고 있다. 물질적 풍요 앞에서 느끼는 내면의 공허, 프랭클의 용어로 실존적 공허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해지고 있다.당신은 매일 다른 사람들과 얼마나 자주 의미있는 연결을 하는가? 그러한 순간을 놓치지 않고 진정 마음에서 우러난 접촉을 하는가? 당신이 만나는 사람들을 존중하는가? 시간을 갖고 대인관계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 당신의 자신의 시간을 존중하는가? 여러 차원에서 연결을 경험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루하루를 대충 보내고 다음 날 월급을 기다리는 것으로 경험을 제한하는가?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고 있는가?

 

우리는 회사나 정부, 친구나 이웃에게까지 점점 더 냉소적이 되고 있다. 교육체계는 실망스럽고, 젊은이들은 냉정하고 침울해지고 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겉과 속이 다른 것을 보여주는 의미에 대한 소리 없는 외침이다.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으야만 우리의 일상이 의미있는 나날로 채워질 것이다. 지도층이 의미를 존중할 때 그 조직의 구성원들은 자신이 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기 쉬워진다. 그것은 의미있는 가치의 자연스러운 반영이다. 만일 우리가 가치를 평가 받고 행복을 보장 받는다면 우리는 자신을 의미있는 전체의 일부로 느낀다. 

 

요즘 기업들은 위기에 처해 있다. 많은 기업에서 사명감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기업을 움직이는 힘들이 너무 분산되어 있어서 계층간에 의미있는 연결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수익에만 의미를 두면 자본주의의 중심에 있어야할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판단은 잊혀지고 만다. 직책과 관계없이 회사의 모든 구성원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일터에서 의미를 선택하면 주위 사람에게도 관심을 갖게 된다. 존경과 친절과 예의를 선택하게 된다. 정의와 공정한 태도를 선택하게 된다. 그 방법은 단순히 동료를 인정해 주는 것일 수 있다. 때로는 건설적인 변화를 위해 체계적인 지원을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할 때 일터에서 의미있는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결정을 움직이는 것은 손익계산이 아니라 사람이다. 결정을 움직이는 힘이 사람이 아닌 돈에서 나올 때 그 결과를 예상하고 뭔가 조치를 취하는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생각의 포로로 잡혀 있기를 거부함으로써 일에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를 부여할 수 있으며, 그로써 중요한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