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득
국내총생산은 생산량의 합이지만 소득의 합으로도 볼 수 있다. 생산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공헌한 만큼 소득을 얻기 때문이다. 이 소득의 합을 국내총소득 즉 GDI라고 부른다. 국민총소득과 국내총소득의 관계는 국민총생산과 국내총생산의 관계와 같다. 한 국가의 국경안에서 생산활동을 하는 사람의 수입을 모두 더한 국내총생산과 달리, 국민총소득 즉 GNI는 그 나라 시민권자의 소득을 모두 합한 결과이다. 일반적으로 1인당 소득은 국민총소득으로 측정하는 것이 한 나라의 생활수준을 나타내는 가장 좋은 척도라고 간주된다. 평균소득은 소득분배가 더 평등한 나라의 생활수준을 나타내는 데 좀 더 적절한 지표라고 말할 수 있다. 덴마크의 크론화와 멕시코의 페소화의 환율은 1크론당 2.2페소로 멕시코에서 살 수 있는 재화와 서비스는 덴미크에서 1크론으로 살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다. 이 두 화폐의 공식환율은 멕시코의 실제생활 수준을 과소평가 하도록 만든다. 환율은 국제적으로 교역되는 재화와 서비스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서 결정된다. 일정 액수의 돈으로 국제적으로 거래되지 않는 것까지 포함한 모든 재화와 서비스의 가격에 의해 결정된다.
경제학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제달러라는 개념을 만들어 내었다. 이 허구의 통화는 '구매력평가' 라는 개념에 근거를 두고, 여러나라의 소득을 변환해 생활수준을 측정할수 있도록 해준다. 구매력평가는 소비바스켓이라고 부르는 공통적으로 지정한 몇가지 재화와 서비스를 얼마나 많이 살 수 있는지로 그 나라의 화폐의 가치를 측정하는 방법이다. 구매력평가 조정을 해도 1인당 국민총생산이나 1인당 국민총소득 등 소득에 관한 통계수치는 생활수준을 완전히 반영하지 못한다.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금전적 소득에만 의존해서 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정치적 자유, 활기찬 공동체 생활, 자아실현 등 돈으로 살 수 없는 많은 것을 원한다. 금전적 소득이 증가한다 해서 이런 무형의 요소들이 더 좋아진다는 보장이 없을 뿐더러 오히려 희생당할 때도 있다.우리가 완벽하게 합리적인 소비자라고 해도 위치재가 존재하는 이상 소득으로는 진정한 생활수준을 측정할 수 없다. 위치재란 잠재적 소비자중 극소수만 구매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가치가 상승하는 재화를 말한다. 우리 각자의 소득이 올라가더라도 다른 사람들도 소득이 증가해 제알 좋은 위치에 있는 집이나 램브란트 그림 같이 쉽게 구할 수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부자나라는 보통 1인당 국민소득이 4만달러 이상이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2010년 1인당 국민총소득이 가장 높은 나라는 모나코로 19만 7460달러 였고, 그 다음이 리히텐슈타인13만 6540달러였다. 이 두나라는 각각 인구가 3만 3000명, 3만6000명에 불과한 조제 도피처이다. 인구가 50만 이하인 국가를 제외하면, 국민총소득이 8만 5380달러인 노르웨이가 세계에서 가장 부자나라이다. 가장 가난한 4개국은 한 사람이 하루 평균 1달러도 벌지 못한다. 1인당 국민소득이 160달러인 부룬디는 2010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기록 되었다. 가장 가난한 나라 몇 곳의 1인당 평균소득은 하루 1달러도 안되는 연간 365달러 이하였다. 후진 개발도상국들 대부분은 아프리카에 있고, 네팔, 방글라데시, 캄보디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 아시아 국가도 소수 포함되어 있다.
중남미국가는 아이티 단 하나였다. 구매력 평가조정을 거치고 나면, 생활수준의 격차가 생산성격차 만큼 극심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매력 조정 평가를 거치고 나면, 6만3850달러의 룩셈브루크가 세계 제일 부자이다. 가난한 나라들은 구매력 평가조정을 하고 나면 1인당 소득이 상당히 많이 올라가는데, 이 나라들 에서는 국제적으로 교역하지 않는 서비스와 일부 재화의 값이 상대적으로 싸기 때문이다.
행복
중요한 것을 모두 측정할 수는 없고, 측정할 수 있는 것이 모두 중요한 것도 아니다. 행복을 측정하는 것이 가능한가? 행복을 측정해야 하는가?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처지를 좀더 견디기 쉽도록 상황을 재해석한다. 이런 적응된 선호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자기가 얻을 수 없는 것은 그다지 좋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버리는 ‘신포도’는 그중 가장 고전적인 예다. 억압을 받거나, 착취나 차별을 당하는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자신이 행복하다고 답한다. 그리고 그 답은 거짓말이 아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상황을 향상시킬수 있는 변화에 반대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답한 설문결과가 나왔다고 해서, 불평등 하고 잔혹한 일이 자행되는 사회를 용인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억압받는 여성이나 기아에 허덕이는 가난한 소작농이 스스로가 행복하다고 느낄 때, 그들에게 행복해 하면 안된다고 말할 권리를 가진 사람이 있을까? 누군가에게 진실을 말해줌으로써, 그들을 비참하게 만들 권리를 가진 사람이 있을까? 이런 문제에 쉬운 답은 없다. 행복도 지수의 숫자는 그것이 완전히 주관적이든 혹은 더 객관적인 지표를 포함하고 있든, 그 자체로 별 의미가 없다. 경제학에서 어떤 개념을 정의하고 측정하는 것은, 물리학이나 화학에서 하는 정의와 측정작업처럼 객관적일 수 없다. 생산량이나 소득처럼 겉보기에는 가장 간단할 것 같은 경제학적 개념도 산출하는데 각종 어려움이 따른다. 생산량, 성장률, 실업율, 불평등 수준 등에 관한 주요 숫자를 모르고서 우리는 실제 세상의 경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숫자들이 무엇을 말해주고 무엇을 말해주지 않는지를 항상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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