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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생활사 (차윤정)

 큰 나무들의 잎이 피어날 때 쯤이면 어김없이 노란 바람이 분다. 큰 나무의 잎은 피어날 때 잠깐  주저한다. 잎이 벌어지는가 싶은데 성장을 멈춘듯 정지하는 것이다. 그 사이 잎겨드랑이 에서는 새로운 무언가가 자란다. 바로 큰 나무들의 꽃이다. 큰 나무들이 잎을 피워내는데 게으름을 피우는 것은 꽃에 대한 배려다. 꽃가루가 날라다닐 여백을 만드느라 나뭇잎은 더디 자라는 것이다. 식물들에게 꽃은 생식기관이다. 나무 마다 다른 꽃을 가지는 것은 분명한 종의 경계를 나타낸다. 꽃 밥이 봄볕에 여물면 작은 바람에도 터져버린다.  알알이 벌어진 틈새로 노란 가루가 쏟아지면서 공중으로 비상한다. 노란 바람은 짝을 만날 때까지 공중을 떠 돌다 일부는 웅덩이로, 일부는 땅으로, 일부는 생물의 몸속으로 들어간다.

 

신갈나무든 서어나무든 오리나무든 소나무든 암꽃들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게 줄기 끝에 살포시 앉아야 한다. 암꽃의 정체는 봄에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꽃가루를 만난 암꽃만이 저무는 봄날, 씨앗이나 열매로서 위대한 자신의 존재를 나타낸다. 화려한 향기도 모양도 색도 갖추지 못한 꽃일지라도, 나무는 해마다 씨앗을 잉태하고 수억년의 세월을 살아왔다.무성한 초록식물들이 지금과 같은 지구의 모습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고생대로, 지구가 탄생한지 40억년이 지난 후였다. 그 후 꽃이 탄생하기까지 또 다시 5억년 이상이 흘렀다. 그로부터 꽃을 감상할 사람이 태어난 것은 1억5천만년 뒤의 일이다.

 

식물 조직의 일부가 어느 정도 성숙하여 번식할 시기가 되면, 암컷 생식세포와 수컷 생식세포를 만들어 내는 본격적인 생식구조로 바뀌는 것이 꽃이다. 애초의 꽃은 매우 간단하여 개념상의 꽃과는 거리가 멀었다. 뭍으로 올라온 식물들은 물대신 바람에 의해 수컷의 생식세포를 날릴수 있도록 변신을 꾀하였다. 꽃가루가 만들어진 것이다. 바람은 항상 숲을 서성이고 있었으며, 꽃가루는 이 바람을 따라 어디든 갈 수 있었다. 단한가지 원하는 상대에게 제대로 도달할 확률이 문제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꽃가루를 만들어야 했다. 수꽃이 물을 극복한 결과로 꽃가루를 만들었다면, 암꽃은 씨앗을 건조한 환경으로부터 보호하는 구조를 발달시켰다. 종자의 껍질을 딱딱하게 만들고, 씨앗을 단단하게 감싸는 비늘 조각을 만들고, 나아가 씨앗을 보관하는 씨방을 만든 것이다.

 

느리기는 하나 식물사회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그 옛날 나무들의 덩치는 지금보다 훨씬 컸으며, 새로운 식물들이 틈을 비집고 생겨나기 시작했다. 바람만으로 식물의 세계에서 자신의 짝을 찾는데 한계가 있었다. 뭔가 특별한 구조가 필요했다. 꽃잎의 발달은 이런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한 발명품이다. 나무는 또한 멀리 있는 곤충을 부르기 위해 꽃의 색과 향을 갖추고, 꽃잎을 교묘하게 배치하여 시각적 구도를 완성했다. 곤충들은 꽃들의 발달에 대응하여 주둥이와 대롱을 갖도록 진화하기 시작했다. 생물간의 진화는 서로간의 탐색과 경쟁,  자극에 의해 발달하는 더욱 치밀한 구조를 갖게 된다.

 

화려한 꽃을 피움으로써 더욱 확실하게 씨앗을 잉태할 수 있게 되었지만, 꽃을 피우는데 드는 비용 때문에 나무는 소비적인 삶을 살게 되었다. 화려한 꽃을 피우는 나무들은 꽃잎이 없는 꽃을 피우는 나무들에 비해 수명이 짧다. 꽃을 피우기 위한 대가는 씨앗을 만들고,  자손을 퍼뜨릴 수 있는 기회를 갖는 대신 숲의 지배자 자리를 영원히 넘보지 말 것이며 긴 수명을 포기하는 일이었다. 꽃들은 특수한 모양을 하거나 특수한 향기를 발산함으로써, 곤충과의 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꽃과 곤충은 상호 발전한다. 꽃은 적절한 보상을 통해 곤충을 협력자로 만든다. 잎과 다른 아름다운 꽃이 제공하는 달콤한 보상을 경험한 곤충들은 매번 꽃이 핀자리를 서성인다. 결과적으로 꽃은 벌에게 적절한 보상능력을 보증해 주며 아름다운 것이 된다.

 

수꽃은 강해지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암꽃은 예뻐지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식물의 역사는 주로 대낮에 이루어 지기 때문에 꽃의 외형은 빛이 최고조인 한낮에 가장 아름답게 빛난다. 꽃들이 구사하는 아름다움의 방법들은 시각적인 수단을 통하는 것이다. 꽃이 꽃색을 선택하는 과정은 곤충들의 눈을 자극하고,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꽃은 화학적인 방법으로 동물을 중독시키는 전략을 발달시켜 나갔다. 백악기에 많은 꽃들이 출현하면서 다양한 종류의 화학성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꽃의 시각적 아름다움이 진화의 한 분수령이라 한다면, 꽃이 만들어 내는 화학물질의 세계는 또 다른 축을 이룬다.  꽃의 향기는 아름다운 외형과 함께 곤충을 부르는 광고물이다. 향기의 중독성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꽃잎에는 식물의 다른 기관에 없는 아주 맛난 성분이 있다. 최고의 만찬이다. 그래서 꽃들이 내 뱉는 향기 속에는 자신을 노리는 불청객을 막기위한 성분도 들어 있다.

 

나뭇가지도 잎에 가려져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한 드러나지 않고 묻혀 버린다. 거대한 잎덩어리가 공중에 떠 있을 따름이다. 숲은 단조로운 초록 빛을 띠게 된다. 그 초록을 견제하는 것이 흰색이다. 하얀 찔레 꽃이 먼저 도전장을 던진다. 오월이 마지막에 이를 때 덤불을 이룬 찔레는 흰꽃을 무리지어 피운다. 봄 늦게 피어나는 꽃들은 초록색을 견제하기 위해 자신을 드러내는 흰꽃을 피워낸다. 꽃 색이 곤충을 선택했는지 곤충이 꽃색을 선택했는지, 그 관계의 전후는 모르지만 초록 배경 숲에 흰색은 곤충들에게 가장 도드라지는 색이다.

 

질퍽이는 땅이든 마른 땅이든 물속이든 가리지 않고 무리지어 세력을 과시하는 풀들은 식물세계의 강자임에 틀림 없다. 화려한 꽃을 피우지 않아도 얼음 덮힌 북극에서 남극에 이르기까지 빈땅이라면 어디든 파고 드는 이들이야 말로 지구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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