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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정심, 나를 지켜내는 힘( 토마스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

누구에게나 거부감이 들고 참을 수 없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은 불의를 혐오하고, 어떤 사람들은 불완전한 상태를 참을 수 없어한다. 멍청한 생각을 참을 수 없어 하는 사람들도 있다. 뭔가를 강하게 거부하는 것은 자신이 개인적으로 중요시 하는 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무관심 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할수록 더 괴로워진다. 불의보다 정의를, 불완전함보다 완전함을, 어리석음보다 똑똑함을 선호하는 것은 괜찬다. 그 정도로는 평정심을 유지하며 평온하게 지낼수 있다. 그러나 주변세계가 완벽하게 흠하나 없이 정의롭고 완전하고 똑똑해져야 한다고 고집하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왜 무엇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왜 과장하고 부풀리는가? 그것은 무엇이든 간에 X를 참을수 없을까봐 두려워 하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가 X에 대처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면 원하는 경우 변화시킬 수도 있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다. X를 견딜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주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실제 그것을 견딜수 있다는 확신이 들어야 하며 자신이 X에 대처할수 있는 이유를 찾아야 한다. 과거에 이미 극복했던 일들, 또는 다른 누군가가 이미 이겨낸 일이라면 당신도 극복할 수 있다. 누가 당신을 도와줄까? 때로는 견딜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힘든 일은 지나갈 것이며 그러면 그 동안 주어진 문제를 과대평가하고 자신의 극복 가능성을 과소평가하고 있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불확실한 의심은 해낼수 있다는 믿음으로써 불식시키는수밖에 없다.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은 비관론자와 낙관론자의 생각이 어떻게 다른지 연구하고, 낙관론자 들은 불쾌한 일을 경험할 때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고 한다.

 

불쾌한 일은

* 지나간다.

* 인생의 일부분일 뿐이다.

* 그냥 운이 없었던 것 뿐이다.

 

유쾌한 일은

* 유지 되거나 다시 찾아온다.

*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영향을 미친다.

* 자신의 능력에 달려있다.

 

하지만 비관론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불쾌한 일은

* 지속된다.

* 인생의 전반을 쥐고 흔든다.

* 자신의 잘못 때문에 발생한다.

 

유쾌한 일은

* 지나간다.

* 제한되어 있다.

* 순전히 운에 달려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내뜻대로 결정할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날씨는 제멋대로 흐렸다 맑았다하고, 지구는 제 편한대로 자전한다. 정부는 제 맘대로 공약을 깨뜨리고, 키우던 햄스터는 때가 되면 죽는다. 로또 숫자 역시 우리와 상관없이 정해진다. 이런 것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몫이다. 우리는 절망할수도 있고, 평정심을 유지할수도 있다. 욕하고 소리지르고, 웃고 한탄하며, 술 한잔 기울일 수도 있다. 우리는 결코 생각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 상상과 꿈으로 점철된 온갖 장면들이 끊임없이 마음이 눈 앞을 지니간다. 그러나 통제하기는 어려워도 개입할수는 있다. 생각을 의식할수도 있다. 생각을 부여잡을 수도 있고 놓아주고, 다른 생각으로 대치할 수도 있다. 이런 능력이 바로 마음의 평화를 얻는 평정심 훈련의 핵심이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바람직한 생각과 해로운 생각이 머릿속에서 계속 경쟁하기 때문이다. 이 두가지 생각은 늘 가까이에 있다.  어떤 생각이 유용한지 해로운지 구별하고, 스스로 생각을 선택하는 것이 우리과제이다. 우리는 앞으로도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살 수 있다. 아니면 지금까지 와는 다른 새로운 삶을 고안할 수도 있다.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살고 싶은가, 아니면 새로이 시작하고 싶은가?

 

약 2000년전에 그리스 로마철학자들은 생각과 감정사이에 연관성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들은 인간이 외부세계에 대해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내면의 세계는 조절할 수 있다고 보았다. 당시 이런 인식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낸 철학자는 에픽토테스였다. 오늘날 스토아라는 말은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일컫게 되었다. 어떤 사건이 우리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부풀리면서 우리가 스스로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라는 이야기는 바로 에픽토테스의 생각이기도 하다. 1950년대 중반 미국 심리학자 앨버트 엘리스는 스토아 철학을 새로운 치료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앨버트 엘리스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심리학자 아론 벡도 감정의 ABC를 발견하였다. 벡은 환자들과의 대화로부터 정신적인 문제를 유발하는 것은 무의식이 아니라, 잘못된 추론과 가정, 비이성적인 생각, 환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향 임을 발견하였다.  심리적인 장애는 오히려 생각의 오류에 가까웠다.

 

결국 중요한 것은 생각의 오류를 바로 잡는 것이다.  아론 벡은 자신의 방법을 ‘인지행동 치료’라 했다. 자연과학적 방법을 심리학에 도입하고자 했다. 즉 관찰하고, 측정하고, 계산하고 실험하고자 했다. 그러다 보니 정신은 파악하기 힘든 대상으로 다가왔다. 관찰할 수 없고, 구체적으로 잡히지도 않는 추상적인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정신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행동주의 반대 조류를 인본주의심리학 이라고 한다.  이런 과정을 살펴보면, 인간의 인식과정은 정반합을 따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한 가지 생각이 또 다른, 종종 모순되는 생각을 유발하고, 결국은 모두가 좀 더 합리주의적인 생각에 도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