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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사회학 (김명숙 등)

법조사회학 : 한국의 법조(이상수)

사법권 독립의 가치를 이론적으로 정초한 몽테스키외는 재판권이 집행권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을 자유는 없다고 단언했다. 우리나라 사법사에도 재판결과가 왜곡 되었다는 의혹을 받은 사건을 실로 많다.  이재승은 정치적 목적에 봉사하는 재판, 특히 권력자의 이익이나 지배 이데올로기를 충실히 쫓는 재판이 현대사에 부지기수로 등장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결처형 수단으로서의 재판, 정적사냥 도구로서의 재판, 자기사면 도구로서의 재판, 사상경찰로서의 재판, 마녀재판식의 판결이 그 예이다. 법원은 단지 정치적 사건에서만 독립성과 공정성을 유지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재판에서 적지 않은 의혹을 낳은 사례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전관예우이다. 전관예우를 판,검사 퇴직금이라고 한다. 전관예우 관행의 피해는 전관을 이용하지 못하는 수많은 국민들이 부담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발견 되는 법조비리는 일부 법조인의 일탈이라기보다 사법부의 구조적 문제로서 전국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다. 법조인들은 특권적 삶을 살고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법조인들끼리는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고, 연수원을 함께 보낸 동료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보통사람과 분리된 특권집단인 신성가족을 구성한다.

 

19세기말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제국주의 침략으로 일제에 의한 식민지형 사법제도가 도입되었다. 일본어로 된 법령을 동원하여 일본의 재판을 진행했다. 정식재판에 회부된 사건은 극소수였다. 민사분쟁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건은 태형을 수반하는 즉결처분권이 부여된 경찰과 헌병에서 처리 되었다식민지 시기의 형사법은 탄압법 그 자체였고, 권력은 공정한 심판자가 아니라 분쟁의 인위적인 억압과 해결을 위한 수탈자의 모습으로 나타났다해방이후 왜곡된 사법형태는 이러한 식민지적 사법형태와 유사성이 있으며, 그 잔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방직후 직업적 이해관계를 앞세운 조선 법률가의 활동이 관료사법을 탄생시켰다고 보았다. 이래저래 일제의 행정편의적인 관료사법이 극복되지 못한 채 또는 더욱 강화된 형태로 우리주변을 맴돌았다.

 

우리나라에서 해방이후 사법을 통제하려는 정권의 노력은 끊임없이 계속 되었다. 정권은 주로 법관에 대한 인사권을 이용하여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 5공화국이 성립된 이후에 1981년 37명이 재임용 탈락했는데, 그 사유는 국가적 차원에서 부정적인 자세를 가진 법관이 포함되어 있었다. 정보기관인 국가안전기획부에서는 조정관이 있어서 개별 법관들의 판결성향을 파악하여 관리했으며, 재판에 직접 개입했다. 많은 경우 정치권력의 재판개입은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법원자체가 정치권력에 민감하게 반응할수 밖에 없는 취약한 내부구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법관의 신분상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았다.  법관의 인사권은 대법원장에 독점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의 법관은 전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견고한 서열구조를 가지고 있다. 모든 법관은 서열화되어 있고 서열에 따라 승진한다.

 

서열의 순서는 사법시험합격 기수, 사법시험성적, 연수원성적에 의해 정해진다. 이러한 서열승진 체계가 관료주의적일뿐 아니라, 법관으로 하여금 과도하게 승진에 관심을 갖게 하고 출세주의와 보신 주의에 경도 되게 한다. (경도:온 마음을 기울여 사모하거나 열중함.) 법원행정처는 전국 모든 법관에 대한 감시감독기관으로서 기능하며, 그 결과로서 전국의 재판을 평균화, 획일화 하는 거대 권력기관이 되었다. 많은 법관들이 불가항력적 상황에서 부당한 판결을 내렸다기보다 양심의 갈등을 겪으면서도 현실과 타협했고, 권력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했기 때문에 정치권력에 대한 사법권 침탈이 가능 했다는 것이다. 2009년 12월 현재 대한변호사협회 등록된 변호사 수는 9630명이다. 최근 30년사이에 10배가량 증가 했지만, 법률사건의 수도 엄청나게 증가했다. 사건의 수가 변호사 수보다 훨씬 앞섰다. 변호사 수의 부족은 낮은 변호사 선임율로 나타난다. 2008년 현재 민사1심의 변호사 선임율은 20.2%이다. 2007년 당시 30대 대기업 집단에서 고용하고 있는 법률가 수는 모두 160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삼성그룹이 68명으로 절반 가까이 차지하고 있었다.

 

노동조합 등 사회단체에 고용된 변호사는 거의 없는 실정이었다. 전체 변호사 가운데 3%만이 정부및 기업의 사내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어 미국의 20% 독일의 50%에 턱없이 모자란다. 변호사 수를 통제하는 장치는 정원제 사법시험 제도였다. 법률가들의 기득권 보호를 위해 효과적 장벽으로 이용되었다. 법학전문대학원 학생이 배출된 2012년에는 2500명 가량의 변호사가 사회로 나왔다. 신도철 교수는 경제학적인 분석으로 미국 변호사에 비해 적어도 6배의 독점이윤을 누리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 후 장래변호사 수를 예측했다. 그에 의하면 2010년 83,047명, 2015년 102,236명의 변호사가 필요하다. 사법시험은 우수한 인재들이 도전하지만, 그중 극소수만 법조인으로 선발됨으로써,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엄청난 자원 낭비를 유발했다. 심지어는 많은 사람이 고시 낭인이 되어 사회적으로 무용한 인간으로 전락했다. 사법연수원은 수료생 대다수가 변호사가 되는 현실에 맞지 않게, 관료교육을 시키고 있으며, 연수원 기수를 중심으로 판검사와 변호사의 인적네트워크를 형성함으로써, 법조 부폐의 뿌리가 되는 식의 다양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제구조가 고도의 산업사회로 이행함에 따라 새로운 법률수요가 증가했다. 이에 대응한 것이 로펌이다. 로펌은 기업자문을 업무 중심으로 삼고, 시간제 수임료를 받는 등 미국식 로펌모델을 수용했다IMF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시장개방, 노동유연화, 해외자본투자, 민영화, 구조조정, 인수합병 등 다양한 법적문제들이 등장하게 되었고, 이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로펌과 같은 형태의 조직이 필요했고, 로펌은 이를 계기로 크게 성장했던 것이다. 김앤장의 경우 1990년대 초반에 70명 수준 이었지만, 2011년에 400명 넘게 보유하게 되었다. 200명 이상을 보유한 로펌이 304개에 이른다. 로펌의 독점력은 우려를 낳을 수준인데, 6대 로펌이 전체 법률시장의 매출 절반을 가져갈 정도이다. 로펌은 기업의 부도덕한 경영행태에 대한 변호, 해외투자기관과의 결탁, 공직자 회전문 인사를 통한 국정논단(논의하여 결정함), 전관변호사의 대거 영입 등과 관련하여 의혹을 받고 있고, 그 외 과다 수임료, 불투명한 운영방식, 세금탈루 의혹, 쌍방대리문제, 전관예우 문제등도 제기된다. 그리고 기업의 이익옹호에 치중하는 로펌의 성장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